이 대통령, 필리핀 도피 ‘마약왕’ 인도 요청
초국가 범죄 대응 외교 공조
국외도피사범 1000명 넘어
지난해 국외도피사범이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서는 등 해외 거점을 둔 초국가 범죄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필리핀에 수감 중인 ‘텔레그램 마약왕’ 박왕열의 범죄자 인도를 요청하며 범죄 대응을 외교 의제로 끌어올렸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국외도피사범은 1249명으로 집계됐다. 전년도 951명보다 31.3% 증가했으며 한 해 국외도피사범이 1000명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필리핀을 국빈 방문 중인 이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마닐라에서 열린 동포 간담회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한 사기 범죄 피해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해외 교민 대상 범죄는 여전히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특히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 중인 ‘텔레그램 마약왕’ 박왕열을 언급하며 전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범죄자 인도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박왕열은 2022년 필리핀 당국에 검거돼 징역 6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인물이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텔레그램을 이용해 한국으로 마약을 유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한국에서 수사해 처벌하겠다는 취지”라며 “마르코스 대통령도 이른 시일 안에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특정 범죄자의 인도를 직접 요청한 것은 초국가 범죄 대응이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범죄 조직이 해외에 거점을 구축하면서 범죄 구조는 빠르게 국제화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동남아 국가에 콜센터를 두고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방식이 일반화됐다. 마약 조직 역시 해외에서 생산·유통망을 구축한 뒤 국내로 유입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동남아 지역이 범죄 거점으로 활용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비교적 낮은 생활비와 느슨한 금융·통신 규제, 외국인 체류가 쉬운 환경 등이 범죄 조직 활동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부 국가에서는 치안 역량과 사법 협력 체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아 범죄 조직이 장기간 활동하기도 한다.
범죄 유형별로는 사기 범죄가 가장 많았다. 지난해 국외도피사범 1249명 가운데 사기 피의자가 757명으로 60.6%를 차지했다. 사이버도박 141명(11.3%), 마약 범죄 87명(7%)이 뒤를 이었다.
도피 국가도 특정 지역에 집중됐다. 캄보디아 399명, 중국 254명, 베트남 193명, 필리핀 149명 등 동남아 국가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지역은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사기 조직이 활동하는 주요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은 국제공조협의체 운영과 글로벌 공조 작전 ‘브레이킹 체인스’를 통해 해외 범죄 조직을 추적하고 있다.
정부 역시 외교 채널을 활용해 범죄 대응을 확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범죄자 인도를 직접 요청한 것도 해외 거점 범죄 조직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 조직이 해외로 활동 거점을 옮기면서 초국가 범죄 대응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며 “국제 공조 수사와 송환 체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외 거점 범죄 조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범죄 대응 역시 외교와 수사를 결합한 국제 공조 체계로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