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사, 기후 위기 우선순위 설정 가장 취약
은행·증권, 실질적인 대응 체계 미흡
치밀한 리스크 식별 체계 갖출 시점
기후변화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기업의 건전성 및 재무안정성과 직결되는 핵심 경제 위험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금융사들의 기후 위기 대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 위기 중 재무적 중요성이나 발생 가능성에 따라 어떤 것을 먼저 관리해야 할지 정하는 우선순위 기준 설정이 가장 취약했다. 특히 시장 자금 흐름을 쥐고 있는 은행과 금융투자업권에서 우선순위 설정이 가장 미흡했다.
전문가들은 기후 위기가 곧 자본시장의 위기로 직결된다며, 금융사들이 선언적인 공시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재무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보다 치밀한 리스크 식별 체계를 갖춰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할지 몰라" = 2일 한국 ESG기준원의 ‘금융회사 기후 리스크 식별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금융사들은 ‘어떤 규제가 있는지’와 ‘어떤 방법으로 분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를 ‘언제’ ‘어떤 것부터’ 적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로 드러났다.
양희원 한국 ESG기준원 선임연구원(미국 공인회계사)이 국내 금융지주 9개사, 금융투자 10개사, 보험 10개사, 여신전문금융 5개사, 은행 7개사 등 41개 금융사를 대상으로 기후 리스크 식별 필수 요소를 분석한 결과 ‘무엇이 규제인지, 어떻게 분석하는지’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언제, 어떤 것부터 적용할 것인가’, 즉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51.2%가 제대로 공시하지 못했다. 이는 수많은 위험 요소를 나열만 할 뿐, 실제 재무적 중요성이나 발생 가능성에 따라 체계적으로 걸러내는 작업은 절반 이상이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시장의 자금을 융통하는 핵심 주체인 은행(71.4%)과 금융투자업권(70.0%)에서 우선순위 미식별률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해외 은행들과 뚜렷한 격차 = 해외 주요 은행들과 비교해 보면 격차는 더 뚜렷해진다.
기후 관련 규제 환경을 인식하는 수준은 해외(54%)와 국내(57.1%)가 비슷했다. 규제 환경에 대한 설명은 기업이 자사가 직면한 기후 관련 정책・규제 환경이 리스크 식별 및 평가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특히 탄소가격제, 배출권거래제, 공시 의무화 등 규제 변화가 이행 리스크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는 기업이 외부 정책 환경을 독립 변수로 인식하고, 이를 내부 리스크 관리 체계에 통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요소다.
하지만 실질적인 리스크 관리 프로세스를 충실하게 설명한 곳은 해외가 69%인 반면 국내는 28.6%에 불과했다. 기후 리스크는 단기적인 실적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관리가 필수적이지만, 이를 평가할 ‘시간 범위’를 설정하지 않은 비율도 24.4%였다. 이 역시 은행 업권의 미식별률이 57.1%로 타 업권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았다. 양 연구원은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작 내부에서 이를 어떻게 소화하고 대비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빈약하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금융지주 중심의 전략 수립을 넘어 업권별로 기후 리스크 식별 수준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은행과 금융투자 등 미흡 업권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긍정적인 모범 사례도 있다. 신한금융지주다. 양 연구원에 따르면 신한금융지주는 2024년 보고서에서 우선순위 결정 기준은 직접적 영향, 간접적 영향을 구분하는 동시에 중대 리스크 및 기회 여부까지 공시했다.
시간 범위에서는 단기, 중기, 장기의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고, 이에 따라 기후 리스크를 식별했다. 접근 방법에서는 시나리오 분석 등 기후리스크 식별 세부 방법론을 물리적 리스크와 이행 리스크로 나눠 자세히 공시했다. 규제 환경에서는 이행 리스크의 한 유형으로 정책 및 규제 리스크 식별을 공시했다.
◆TCFD 기반 기후리스크 식별 현황 점검 강화 = 한편 최근에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기준 도입 논의와 금융감독원의 ‘기후 리스크 관리를 위한 건전성 감독체계 연구’ 발표 등으로 금융회사의 기후 리스크 관리에 대한 정책적 요구가 강화되고 있다.
글로벌 기후공시 기준인 TCFD(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는 기업이 기후 리스크를 평가할 때 명확한 ‘시간 범위(Time Horizon)’, ‘접근 방법(Approaches)’, ‘우선순위 결정 기준(Prioritization)’, ‘규제 환경(Regulation)’을 필수적으로 밝히도록 요구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한 물리적 리스크와 저탄소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행 리스크는 신용위험, 시장위험 등 기존 금융 리스크와 결합해 금융회사에 구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에 단순 공시를 넘어선 ‘실질적 리스크 식별 체계’ 수준의 점검이 필요하다. 금융사별로 기후 리스크의 영향에 대비하기 위해 이를 식별할 선제적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양 연구원은 “현재 다수 금융사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기후 관련 정보를 공시하고 있지만 해당 공시가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체계적 리스크 식별・평가 절차를 반영하고 있는지는 별도의 점검이 필요하다”며 “특히 개별 기업이 자사의 사업모형과 자산 포트폴리오 특성을 고려해 물리적 리스크와 이행 리스크를 구분하고, 이를 구조적으로 식별・평가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