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 ‘에너지 절약' 긴급 정책 확산

2026-04-03 13:00:01 게재

중동전쟁 여파에 공급 차질

신흥국 중심 수요억제책 강화

중동 전쟁 여파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세계 각국이 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한 긴급 절약 정책을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신흥국을 중심으로 수요 억제 조치가 확산되며 경제 성장 둔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일(현지시간) “중동 전쟁으로 원유와 가스 공급이 줄어들면서 각국 정부가 연료 수요를 줄이기 위한 조치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표적으로 필리핀은 재택근무 확대 등 연료 절약 정책을 시행하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수도 마닐라의 한 식당은 방문객이 30~40% 감소하는 등 소비 위축이 현실화되고 있다. 8년째 근무 중인 계산원 세드릭 곤잘보는 “걱정된다”며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필리핀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국은 공무원 재택근무를 장려하고 냉방 사용을 줄이도록 요청했으며, 베트남은 자전거 이용과 차량 공유를 권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도 공무원 주 1회 재택근무를 도입하고 연료 절약을 촉구했다. 파키스탄은 연료 절약을 위해 국내 크리켓 리그를 무관중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도 대응이 이어지고 있다. 잠비아는 연료 공급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휘발유와 경유에 대한 부가가치세와 소비세를 면제했지만, 항공유와 등유 가격은 한 달 새 50% 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가 단순한 가격 상승을 넘어 ‘수요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투자회사 앱솔루트스트래티지리서치의 신흥시장 이코노미스트 애덤 울프는 “세계 경제가 원유 생산의 10~15%를 잃게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배급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미국 회계컨설팅회사 RSM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조셉 브루수엘라스는 “아시아에서는 수요 감소가 유럽과 미국보다 훨씬 빠르게 나타난다”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단기적으로 경기 위축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에너지 위기는 고용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가 급등 충격 이후 5년이 지나도 고용률이 약 0.45% 낮은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아시아는 이번 위기의 최전선에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4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액화천연가스의 83%, 원유의 84%가 아시아로 향했다. 중동 공급 차질이 곧바로 아시아 경제에 타격을 주는 구조다.

향후 전망도 밝지 않다. 중동 지역 에너지 인프라 훼손과 해협 통과 차질 가능성으로 가격 상승이 장기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유가가 배럴당 135달러 수준을 유지할 경우 2년 내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0.5% 감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부 국가는 보조금 확대나 외환 개입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미국 싱크탱크 외교협회(CFR)의 선임연구원 브래드 세처는 “보조금은 시장의 부족 신호를 왜곡해 조정 필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각국 정책당국은 물가 상승을 억제할지, 재정 부담을 감수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의 클레멘스 그라프 폰 루크너 연구원은 “모든 정책 결정자는 사실상 양자택일의 압박 속에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더라도 에너지 시장 충격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소비와 투자 위축이 동시에 나타나는 가운데, 세계 경제 전반의 성장 둔화 압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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