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 무색한 자사주 처분…80%가 임직원 보상에 활용

2026-04-22 13:00:11 게재

268개사 중 소각 65곳 … 전량 소각은 3곳뿐

주주환원·기업가치제고 입법취지에서 멀어져

임직원 보상 정보공개 … 절차적 통제 장치 필요

올해 3월 기업의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3차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상장사 268곳이 자기주식 보유·처분 계획 승인 안건을 상정, 의결했다.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도 전년 대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다만 이들 기업의 자사주 처분 내용은 상법 개정의 입법 취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 268개사 중 80%에 달하는 209곳이 임직원 보상을 위해 자기주식 처분 계획을 밝혔다. 소각 계획을 밝힌 곳은 65개사였고 전량 소각은 3개사에 불과했다. 자사주를 소각해 주당순이익(EPS)과 주가순자산비율(PBR) 등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기대와 달리, 대다수 기업이 자사주를 임직원 보상용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0곳 중 8곳이 ‘임직원 보상’ = 22일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2026년 정기주주총회에서 자사주 보유 및 처분 계획 안건을 표결에 부친 회사는 총 268개사(코스피 86개, 코스닥 182개)로 집계됐다.

자사주의 활용 목적을 보면 조사 대상 268개사 중 79.8%에 달하는 209개사가 ‘임직원 보상(우리사주제도 실시 포함)’을 위해 자사주를 처분하겠다고 밝혔다. 39개사(14.9%)는 경영상 목적으로 자기주식을 활용할 계획을 밝혔다.

반면, 명확한 주주환원 정책인 자사주 소각이나 주주배정 배당을 처분 목적으로 밝힌 회사는 각각 65개사, 8개사에 불과했다.

특히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 ‘전량’을 소각하거나 배당하는 회사는 각각 3곳뿐이었다. 보유 자사주 전량을 임직원 보상으로 돌리겠다는 회사는 94개사에 달했다. 자사주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소각의 대상이 아니라, 회사의 현금 지출을 막으면서 임직원과 경영진의 보상 재원으로 활용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자사주 소각 본격화? 일부 대기업이 만든 착시 효과 =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해 들어 3개월 동안 주요 대기업 중 60여 개가 43조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 및 처리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총수와 상장 계열사가 있는 73개 그룹(339개 계열사)을 분석한 결과다. 이는 지난 한 해 전체 자사주 소각 규모(13조2850억원)의 3배에 달한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이후 기업의 자사주 소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CEO스코어는 “기업의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3차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주요 대기업의 자사주 소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기업별로 보면 삼성전자가 14조8994억원으로 가장 큰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단행했다. 이어 SK하이닉스도 12조2400억원을 소각했다. 두 회사의 소각 규모는 전체의 63.8%에 달한다.

표면적인 수치만 보면 자사주 소각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본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극소수 대기업이 만들어낸 ‘착시 효과’에 불과하다. 노종화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변호사)은 “거대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상장사들의 소각 실적은 초라한 수준”이라며 “실제로 전체 268개사 중 75%가 넘는 203개사는 기존 보유 자사주에 대한 소각 계획이 단 1주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는 등 주주환원의 온기가 시장 전반으로 퍼지지 못하고 양극화되어 있음을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깜깜이’ RSU 확산 … 유럽식 ‘Say on Pay’ 시급 =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임직원 보상으로 자사주가 대거 쏠리고 있음에도, 이를 투명하게 감시할 절차적 통제 장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268개사 중 보유 자사주의 절반 이상을 임직원 보상으로 쓴다는 기업이 117곳(43.7%)에 달하며, 이 중 처분 규모가 300억원을 넘는 기업도 20곳이나 된다.

최근 주요 상장사 경영진을 중심으로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 등 장기주식 보상 제도가 급격히 확산하는 추세다. 주식 기준 보상(스톡옵션 등)에서 거래상대방이 지분상품을 받을 권리를 획득하도록 하는 가득 요건(Vesting Condition)을 엄격하게 설계한다면 RSU는 경영진의 이해관계를 주주가치 제고와 일치시키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기업들의 제도는 허점이 많다. 자칫 지배주주나 소수 고위 임원에게 과도한 보상을 안겨주고, 기존 일반 주주들의 지분 가치만 희석하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크다.

노 변호사는 “현재 상법 체계에서는 이사회 외에 RSU 부여를 통제할 실질적인 장치가 없다”며 “특히 RSU는 주식이 실제 지급되는 시점에만 보수 총액에 포함되어 공시될 뿐, 제도가 실질적으로 결정되는 ‘부여 시점’에는 구체적인 정보공개나 주총의 승인 절차가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사후약방문식 공시로는 주주들이 경영진의 과도한 자사주 잔치를 막을 길이 없는 셈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부여 시점에서의 통제가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 변호사는 “보상 체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임원 보수 정책(특히 고위 임원) 자체를 주주총회 승인 사항으로 의무화하고, 집행 내역을 주총에 보고해 표결로 의견을 묻는 유럽식 ‘세이 온 페이(Say on Pay, 주주 주식보상 표결제)’ 제도를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사주 소각’ 대원칙 세워야 = 개정 상법은 경영상 목적으로 자사주를 제3자에게 처분하려면 반드시 ‘정관상 근거’를 두도록 통제 장치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올해 계획을 상정한 268개사 중 총 160개 회사가 자사주 처분을 위한 정관 변경 안건을 상정했다. 정관 변경은 주총 특별결의(출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발행주식총수의 3분의 1 이상 찬성)를 필요로 하는 까다로운 안건이다.

그러나 160개사 중 정관 변경이 부결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소수주주들이 뭉쳐 기업의 자사주 남용을 막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사가 자발적으로 상법의 취지를 존중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상법 개정 전과 비교할 때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가 어렵다.

노 변호사는 “결국 해답은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주주환원을 위해 취득하고 소각하는 것’이라는 상법의 본래 입법 취지에 따르는 것”이라며 “이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강조했다. 이어 노 변호사는 “예외적으로 자사주를 처분할 경우에는 기존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주주배정 방식을 우선해야 한다”며 “제3자 처분은 긴급한 자금 조달 등 회사의 생존과 직결된 ‘엄격한 경영상 목적’으로만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

김영숙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