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지업계 ‘카르텔’에 역대급 철퇴…6개사에 과징금 3383억

2026-04-23 13:00:02 게재

수입용지 공세에 ‘가격 유지’ 모의 … 백상지·아트지 등 판매가 인상 주도

공정위, 가격재결정 명령도 부과 … ‘반복담합 근절방안’ 적용 첫 시험대

국내 제지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주요 제지사들이 4년 가까이 조직적으로 가격을 담합해온 사실이 적발돼 정부로부터 역대급 과징금 폭탄을 맞았다. 수입용지의 저가 공세에 맞서 시장 점유율을 지키는 대신, 경쟁 업체끼리 손을 잡고 인위적으로 가격을 끌어올려 출판업계와 일반 소비자의 부담을 가중시킨 결과다.

23일 공정거래위원회는 한솔제지, 무림P&P, 무림SP, 무림페이퍼, 한국제지, 홍원제지 등 6개 인쇄용지 제조판매업자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약 4년간 판매가격을 담합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3383억원(잠정)을 부과하고, 2개 법인은 검찰에 고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6개 제지사에 가격 재결정 명령을 내렸다.

◆원가절감 대신 가격담합 선택 = 공정위 조사결과, 이들 6개사는 국내 인쇄용지 시장의 약 94%를 차지하는 과점 사업자들이다. 담합의 발단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산 저가 수입용지가 국내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시작됐다.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기술혁신이나 원가절감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야 했지만, 이들은 손쉬운 ‘가격 담합’의 길을 택했다.

제지사들은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약 3년 10개월 동안 총 60회가 넘는 영업담당 임원급 모임을 통해 인쇄용지 전제품의 가격 인상을 합의했다.

인쇄용지의 판매가격은 기준가격에서 할인율만큼 차감돼 산출되는데, 6개 제지사들은 담합기간 동안 총 7차례에 걸쳐 할인율을 축소(5회)하거나 기준가격을 인상(2회)하는 방식으로 판매가격 인상을 합의했다. 특히 원재료인 펄프 가격이 오를 때는 이를 핑계로 인상 폭을 키웠고, 펄프 가격이 내릴 때는 담합을 통해 가격 하락을 방어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출판·인쇄업계 직격탄 = 담합 대상이 된 품목은 교과서와 참고서, 고시 공고문 등에 주로 쓰이는 ‘백상지’와 잡지, 카탈로그, 전단지 등에 사용되는 ‘아트지’ 등이다. 사실상 전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매일 접하는 종이들이 담합의 도구로 전락한 셈이다.

이들은 매년 1~2차례씩 정기적으로 인상안을 협의했다. 거래처인 대리점들이 낮은 가격에 종이를 공급하지 못하도록 할인율(할인단가)의 상한선을 공동으로 설정해 고착화하는 방식도 동원됐다.

특히 거래처에 가격 인상을 통보하는 순서도 합의했다. 그 과정에서 논의가 격화돼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서 통보 순서를 정하기도 했다고 공정위는 밝혔다. 그 결과 인쇄용지 판매가격이 평균 71% 상승하는 등 가격 인상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이로 인해 출판업계와 인쇄업계는 원가상승 압박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관련 단체들은 “종잇값이 오르면 책값 상승이 불가피해 결국 독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며 이번 조치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들은 그동안 입은 피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복담합 근절 선언한 공정위 = 이번 조치는 공정위가 이날 발표한 ‘반복담합 근절방안’과 궤를 같이한다. 제지업계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가격 담합으로 제재를 받은 이력이 있다. 공정위는 이번에도 과거 위반 이력을 고려해 과징금 가중치를 높였다. 담합을 주도한 상위 업체들에 대해서는 자진신고 감면(리니언시) 혜택을 엄격히 적용해 제재의 실효성을 높였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영업정지 요청이다. 공정위는 이번 담합이 시장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판단하고, 검찰 고발과 함께 관계부처에 해당 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행정처분을 요청헸다.

공정위는 앞으로도 국민 생활과 밀접한 중간재 시장에서의 담합 행위를 집중 모니터링할 방침이다. 가격인상 요인이 없음에도, 주요 사업자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리는 징후가 포착될 경우 즉각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번 제재는 수입지의 공세라는 외부 환경을 핑계로 국내 시장의 경쟁을 원천 차단한 카르텔을 엄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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