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칼럼
미국 눈치보는 정치,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미국의 간택’이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한국이 북한과 대치하는 데다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약소국 신세일 때였다. 정통성이 없는 군사독재정부였을 때 더욱 그랬다. 한국이 미국의 신임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배경은 미국 중심 질서 안에서 태동한 나라여서다. 광복 직후 한반도 남쪽의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군정 아래 들어갔고, 정부 수립도 미국의 승인과 지원 속에 이루어졌다. 6.25전쟁 이후 미국은 한국의 생존 보증자처럼 됐다. 이 출발이 암묵적 구조를 고착시켰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묘안을 짜낸다. 좌익 이력을 지닌 박정희로서는 대표성과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었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군사정부 ‘승인’을 받았다고 과시한다. 이게 엄청난 정치적 효과를 몰고 온다.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1979년까지 장기집권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국빈 방문자로 자신을 선택하게 해 ‘미국이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뒤 보수 진영의 유력 대권 주자들은 미국에 가서 눈도장을 찍는 걸 필수 코스로 여겼다.
미국 승인에 기대온 권력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미국 방문도 트럼프행정부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 한국 보수 야당 대표성을 각인시키고 싶은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면담자 이름이 공개된 인사들은 미국 내 부정투표를 주장하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일으킨 쿠팡을 옹호해 온 하원의원이 고작이다.
그를 초청한 극우 성향 국제공화연구소 연설에서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이재명정부를 비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심각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 동맹 신뢰의 근간을 약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워싱턴 특파원 간담회에서는 “한국이 이란전쟁에서 미국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는 미 당국자 지적이 있었다”는 근거 불명의 얘기도 꺼냈다. 방미 목적이 한미동맹을 흔들고 윤석열 계엄 명분의 하나인 부정선거론을 재점화하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장 대표는 앞서 미국 회사 ‘쿠팡’의 불법·불공정 행위에 대해서도 쿠팡을 엄호하고 한국정부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정권은 쿠팡 사태 초기부터 여론을 선동하고 언론을 압박해 반미 프레임을 짜는 데만 몰두했다.”
한술 더 뜨는 국민의힘 의원도 있다.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 54명의 쿠팡 관련 서한에 대해 우원식 국회의장이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하자 ‘윤어게인의 전사’ 김민전 의원은 “이번 지선(지방선거)은 ‘YES USA’와 ‘NO USA’의 싸움”이라며 미국과 쿠팡을 두둔하고 나섰다.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국민의힘이 보여준 모습은 ‘무작정 친미’일 뿐 국민의 분노나 정부의 처벌 의지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쿠팡의 국적이나 매출 규모와 상관없이 3370만명의 개인정보를 유출해 국내법을 위반했다면 조사와 처벌 또한 한국 사법 체계를 통해야 마땅하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직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숙청 또는 혁명 같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파문이 일었을 때다. 트럼프의 이해 덕분에 전화위복으로 마무리됐으나 나경원 의원은 “이재명정권이 보여준 독재적 국정 운영, 내란몰이, 사법시스템의 파괴, 야당에 대한 정치보복, 언론에 대한 전방위적 장악이 미국의 눈에 ‘숙청’과 ‘혁명’처럼 비친 것 아닐까”라고 아전인수식으로 대응했다.
10여 년 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서에서 드러난 한국 정치인과 고위 관료의 충격적인 숭미행태가 떠오른다. 한미 자유무역협상에서 국회가 한국 농민에 맞서 저항할 용기를 내야 한다면서 농업 생산액 대비 농업 보조금 비중이 14.6%나 되는 미국이 아니라 4.6%밖에 안되는 한국이 문제라고 미국 대사에게 일러바친 국회의원이 있었다. 한국정부의 입장을 미국에 설득하는 일은 하지 않고 되레 미국정부의 입장을 한국에 관철하려고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통상교섭본부 관료도 폭로됐다.
외세 의존 정치 나라의 걸림돌일 뿐
미국의 개입을 기대하고 공공연히 워싱턴을 누비는 정치인과 자칭 애국시민들의 행태가 익숙한 풍경이 됐다. 나라 안에서 만만찮은 세력으로 성장한 극우정치 외곽 조직들의 숭미행태도 안타까움을 넘어 딱해 보인다. 전세계에서 성조기를 들고 시위하는 곳은 대한민국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중견국가다. 뒤떨어진 정치인들과 그 지지층이 여전히 열등감에 사로잡혀 외세 의존 정치의 민낯을 드러내는 건 수치스럽다. 스스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주장하지만 낡은 시대의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나라의 걸림돌일 뿐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