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공급망 다시 짜인다

2026-05-07 13:00:08 게재

AI 수요 폭발에 미국·유럽·한국 투자·생산 거점 고민 … 미중 갈등도 변수

5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 포럼 및 전시회인 SEMICON Southeast Asia 2026에서 로봇이 칩을 조립하는 작업을 시연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이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다시 흔들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올해 1조달러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한때 기술 산업의 부품에 가까웠던 반도체가 이제는 AI, 슈퍼컴퓨터, 자동차, 가전제품을 움직이는 세계 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올라섰다.

블룸버그는 6일(현지시간) 반도체 기업과 각국 정부가 수십 년 만에 “반도체를 어디서 만들 것인가”를 다시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요는 폭발하고 있지만, 생산 거점은 특정 지역과 기업에 집중돼 있다. 미중 갈등과 대만을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까지 겹치며 반도체는 산업 문제가 아니라 안보 문제가 됐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 내 생산 확대다. 대만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블룸버그는 이를 미국이 반도체 설계 역량은 여전히 강하지만 제조 기반을 상당 부분 잃은 흐름을 되돌리는 시도로 평가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도 텍사스주 셔먼에서 새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저비용 국가가 아닌 미국 본토에 공장을 짓는 것은 중국의 생산 확대에 대응하려는 전략이다.

반도체 장비의 병목도 공급망 재편의 핵심이다. 네덜란드 장비업체 ASML은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TSMC와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포함한 주요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ASML 장비에 의존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중국의 첨단 반도체 제조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 장비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ASML은 가장 앞선 장비를 중국 시장에 팔지 못하고 있다.

AI 수요는 한국과 유럽 시장도 밀어 올리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한국 증시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주가 강세를 보이며 코스피 상승을 이끌었다.

독일 반도체 기업 인피니언테크놀로지스도 AI 데이터센터용 전력공급 솔루션 수요 증가를 이유로 실적 전망을 높였다. 요헨 하네벡 인피니언 최고경영자(CEO)는 “AI 열풍은 더 강해지고 있으며, AI 데이터센터용 전력공급 솔루션 수요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문제는 반도체 공급망이 단순한 공장 증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는 설계, 위탁생산, 메모리, 장비, 소재, 패키징이 모두 맞물려야 한다. 어느 한 곳에 병목이 생기면 AI 투자 속도 전체가 늦어질 수 있다. 특히 대만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이 집중돼 있어 중국의 대만 압박은 계속 위험 요인으로 남아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기업의 투자 판단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해외에 공장을 두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핵심 부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반도체가 전략 물자가 되면서 공급 안정성이 가격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특히 AI 서버용 칩은 전력반도체와 메모리까지 함께 필요해 한 기업의 증설만으로 수요를 따라가기 어렵다.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은 기술력만의 싸움이 아니다. 기업과 국가는 이제 비용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위기 때도 끊기지 않는 생산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공장 증설은 비용 부담이 크지만, 대만 의존과 중국 견제라는 지정학적 위험을 줄이기 위한 보험 성격이 강하다. 반도체 공급망은 효율을 좇던 세계화의 산물에서, 안보와 통제 가능성을 함께 따지는 전략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 AI 수요가 커질수록 반도체 공장의 위치는 세계 산업정책의 승패를 가르는 변수가 될 전망이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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