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시장을 시험하는 재벌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한화솔루션의 유상증자 신고서 수리를 2차례 거부했다. 이에 따라 한화솔루션의 유상증자는 일단 벽에 부딪힌 상태다. 한화솔루션은 결국 지난 12일 정정공시를 통해 모든 유상증자 관련 일정을 ‘미정’으로 변경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 3월 26일 2조4000억 원의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틀 전(3월 24일) 열린 주총에서는 증자 계획과 자금 사용처를 일절 함구했다. 다만 정관의 ‘발행 예정 주식의 총수 변경’ 안건만 슬그머니 통과시켰을 뿐이다.
금융감독원 거부로 벽에 부딪힌 한화솔루션 유상증자
한화솔루션이 유상증자를 통해 발행하기로 한 주식은 7200만주로 기존 주식의 42%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주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증자액의 사용처도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미래를 위한 설비투자는 9000억원에 불과한 반면 1조5000억원은 기존 빚을 갚는 데 쓴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주주들의 배신감이 폭발했다. 때문에 공시 당일 한화솔루션의 주가는 18%나 하락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 2024년부터 연간 수천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차입금은 지난해말 기준 12조원을 넘고 연간 이자 비용만 6000억원에 달한다고 회사측은 밝혔다.
순차입금 규모가 상각전 영업이익(EBITDA)의 29배를 넘는다. 주주들의 들끓는 비판 앞에 한화솔루션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30년까지는 추가증자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김동관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과 사외이사들이 자사주를 사들였다. 김승연 회장은 연봉을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다.
회사의 도약을 위해 때때로 증자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증자에 앞서 스스로 도우려는 노력을 통해 주주와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이 순리다. 한화그룹에서는 이미 2조3000억원 상당의 자구노력을 기울였지만 신용등급 하락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소액주주의 주머니를 털어 부채를 갚아야 할 상태라면 자구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추가적인 자구노력을 충분히 이행한 다음 주주들을 설득해야 한다.
당장 자구노력을 다 하기 어렵다면 언제까지 어떻게 할 것인지 일정을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정직한 해법이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증자규모를 산출하면 된다. 이런 방법이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쉬운 길이다. 어느날 갑자기 무모한 증자계획을 내놓아 역풍을 맞고 금융당국의 간섭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떳떳한 길이다.
주주와 시장 및 당국을 시험하겠다는 자세부터 고쳐야
사실 재벌들은 가끔씩 시장을 시험하곤 했다. 지난해에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3조6000억원이라는 거액의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가 반발을 사서 증자규모를 축소한 바 있다.
두산그룹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업재편 계획을 내놓았다가 철회했다. 이 모두가 요행을 바라는 심사에서 비롯됐다고 여겨진다. 주주의 권익을 가벼이 여기고 당국의 누군가가 비호해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된 악습이다. 그런 악습 때문에 한국의 주식시장은 오랜 세월 저평가의 굴욕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낡은 습성을 버려야 한다. 공연히 주주와 시장 및 당국을 시험하겠다는 오만한 마음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주주를 비롯한 이해당사자들의 공감 속에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가 앞당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