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남미가 뚫는 ‘육상운하’, 한국이 펼쳐야 할 새 지도

2026-05-15 13:00:01 게재

1869년 5월 10일 미국 유타주 프로몬토리 서밋. 동쪽에서 달려온 유니언 퍼시픽과 서쪽에서 달려온 센트럴 퍼시픽이 마지막 황금 스파이크(golden spike)를 박았다. 두 대륙의 철로가 맞물린 순간이었다. 대서양 국가 미국이 태평양 국가로 완성되던 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6개월 걸리던 길은 6일로 줄었다. 상품이 흘렀다. 자본이 따라붙었다. 서부개척은 폭발했다. 미국의 운명이 바뀌었다.

1916년 러시아는 유럽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9288km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성했다. 광활한 유라시아의 심장을 꿰뚫은 강철 동맥이었다. 잠자던 동토의 가치가 깨어났다. 영국의 지정학자 핼퍼드 매킨더는 간파했다.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교훈은 단호하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육로 교통망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다. 낡은 질서의 해체이고 새 질서의 탄생이다. 국가의 체급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사건이다.

조 코커의 끈적한 명곡 ‘언체인 마이 하트(Unchain My Heart)’를 떠올려 보자. “내 심장을 묶은 사슬을 풀어달라.” 그 절규는 오늘의 세계와 묘하게 닮아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글로벌 공급망. 숨이 막힌다. 프란츠 카프카의 ‘미궁’ 같다. 복잡하고 부조리하다. 한번 꼬이면 모두가 흔들린다.

4개국 3250km, 대륙횡단도로망 가시권

지금 남아메리카가 오래된 사슬을 끊으려 하고 있다. 브라질 대서양 항구 산투스에서 출발한다. 파라과이 차코 평원을 지난다. 아르헨티나 북서부 산악지대를 넘는다. 그리고 안토파가스 등 칠레 태평양 4개 항구에 닿는다. ‘양대양 대륙횡단도로망(Corredor Bioceánico)’. 총연장 3250km. 4개국을 꿰뚫는 거대한 핏줄이다. 이 구상은 1960년대 브라질 경제학자 셀소 푸르타도의 상상에서 출발했다. 바다와 바다를 육지로 잇는 꿈. 운하를 대신하는 ‘육상운하(dry canal)’의 꿈이었다. 그 꿈이 지금 아스팔트가 되고 있다.

현재 남미 대서양 연안에서 출발한 화물은 아시아로 가기 위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최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아가거나, 파나마운하를 통과하거나. 남미는 이제 그 오래된 길의 독점을 흔들려 한다. 물론 변수도 있다. 2024년 중국 국영기업의 투자로 페루 찬카이항이 문을 열었다. 일대일로와 남미의 육상운하가 어떤 긴장과 협력을 만들어낼지 세계는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이 도로망의 본질은 물류만이 아니다.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언이다. 한 아르헨티나 언론은 “이것은 단순히 항구와 화물을 잇는 사업이 아니다. 전략적 자율성의 선언이다”라고 보도했다. 파라과이는 더 직설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내륙국가가 아니다.” 브라질 역시 마찬가지다. 대서양보다 태평양이 아시아에 더 가깝다. 지도를 뒤집어 보면 단번에 보이는 사실이다. 다만 아무도 뒤집어 보지 않았을 뿐이다.

경제적 잠재력은 숫자가 증명한다. 미주개발은행(IDB)에 따르면 2025년 남미 수출은 전년 대비 5.1% 성장했다. 그 증가를 이끈 최대 시장은 아시아였다. 페루는 수출 증가분의 2/3를 아시아가 흡수했다. 중국은 브라질 대두의 70% 이상을 사들인다. 아시아 입장에서 이 도로망은 거대한 선물이다. 완공되면 운송 시간은 15일 줄어든다. 비용은 30% 절감된다.

남미판 파나마운하를 눈여겨 봐야 할 이유

이 변화는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무역과 에너지 공급망은 몇개의 좁은 해협에 목줄이 걸려 있다. 호르무즈 말라카 등 특정 항로에만 생존을 의탁하면 언제든 인질이 된다. 길이 막히는 순간 경제도 멈춘다. 외통수에 걸린 뒤에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결국 답은 하나다. 다변화 외교, 전방위 외교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 전체 교역에서 중남미가 차지한 비중은 겨우 4.3%였다(581억달러). 한국-일본 교역 규모(772억달러)보다도 작다. 세계는 지금 새로운 길을 내느라 분주하다. ‘남미판 파나마 운하’에 우리가 매서운 시선을 던져야 할 이유다. 남미의 실험이 우리에게 내미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회전략, 위험분산이다.

길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다. 먼저 내는 자의 것이다. 안토파가스타-산투스 간의 첫 화물차가 대륙의 척추를 가로지르는 날, 글로벌 사우스 라틴의 거대한 엔진은 거칠게 박동할 것이다. 한국은 새로운 지도를 펼치며 혁신적 셈법에 나서야 한다. 공급망 다변화는 구호가 아니다. 생존의 좌표이며 항로다.

윤찬식 인하대 특임교수 전 파라과이·코스타리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