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AI 시대 노동의 자리는 어디인가

2026-05-15 13:00:02 게재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스물두 살의 재단사가 몸에 불을 붙이며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인간을 기계로 취급하던 야만의 노동 시대에 던진 ‘인간선언’이었다. 그 외침이 울려 퍼진 자리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시작됐다.

하지만 그 여정은 험하고 지난했다. 197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부터가 처절한 싸움이었다. 동일방직과 YH무역처럼 똥물을 뒤집어 쓰는가 하면 죽어 나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가에게 노동은 존재 의미이자 삶의 가치였고 인간 해방의 언어이며 희망이었다.

1980년대 더욱 엄혹해진 체제 속에서도 노동은 진보하고 발전했다. 5.18광주민주항쟁 이후 체제변혁을 꿈꾸는 학생운동 출신이 대거 공장으로 들어갔다. 학출 노동자와 1970년대 선진노동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노동자들이 의식의 눈을 뜨고 변혁의 언어가 생산현장을 뒤덮었다. 그 축적된 에너지는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 폭발한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고 전노협을 거쳐 1995년 민주노총 출범으로 귀결됐다.

AI 시대, 기술의 혜택 어떻게 나눌지가 관건

전태일 분신 56년, 민주노총 출범 31년, 우리는 전혀 다른 노동과 마주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 발전 등으로 인한 노동 소멸 담론이 만발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삼성전자 노조의 총파업 예고라는 국가적 노동쟁의 사건에 직면한 것이다. 먼지 자욱한 봉제공장이 아니라 먼지 하나 허용치 않는 클린룸의 노동, 시급 1만320원 최저임금이 아니라 ‘1인당 6억원이 넘는 성과급’ 노동의 이야기가 됐다.

노동 패러다임 변화는 일찍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민주노총이 출범한 해인 1995년 제러미 리프킨은 저서 ‘노동의 종말’을 통해 정보화시대가 오면 기술이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후 30여년간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플랫폼 경제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과거 모습의 노동이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 사태는 노동의 위기를 더욱 가속화했다. 정리해고 외주화 플랫폼노동의 확산 등은 노동을 파편화했고 노동자의 연대와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여기에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노동의 개념 자체를 집어삼키는 상황을 맞고 있다.

AI 기술로 무장한 빅테크 기업들은 노동뿐 아니라 자본까지 뒤흔든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이미 사망하고 빅테크 소유자가 영주처럼 군림하는 ‘테크노봉건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본과 노동의 대립 자체가 무의미한 구조다. 노동이 소멸하고 자본이 몰락한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빅테크 기업가들이 기본소득이라든가 그와 유사한 대안을 내놓는 것은 이에 대한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이자 선제적 대응인 셈이다.

이제 노동의 미래를 생각할 때다. 험난하고 격렬했던 노동운동사의 긴 흐름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연구가 김창우 박사는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는 저서의 제목을 통해 “AI 시대 노동이 소멸해가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해야 할 일은 사라지는 일자리를 슬퍼하는 게 아니라 기술의 혜택을 어떻게 나눌지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조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노동운동사의 주요 분곡점을 훑으며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조직화해 사회에 균열을 냈는지 통찰했다. 1970년대 전태일 정신으로 민주노조의 싹을 틔웠고 1980년대 경제주의와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변혁 지향과 연대를 통해 민주화에 기여하고 전노협 건설에 이르렀으나 1990년대 민주노총을 결성하면서 전노협을 청산한 것을 한계로 지적했다.

노동 재정의, 투쟁 재설계가 필요한 시대

1970년대 취재수첩을 수놓았던 단어들이 ‘땀’ ‘배고픔’ ‘투쟁’이었고 1980년대에는 ‘해방’ ‘단결’이었다면 지금의 취재수첩은 ‘알고리즘’ ‘국민배당’ ‘공정’ 같은 생소한 용어로 채워질 것이다. 사회변혁을 꿈꾸고 폭넓은 연대를 했을 때 노동은 승리했다. IMF 이후 노동자 사이에 계급이 생겨나고 연대가 흔들리면서 노동은 실패와 고립을 자주 겪었다.

‘AI 시대의 노동’은 노동을 재정의하고 투쟁의 대상과 방법을 재설계하고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노동은 사라지고 이익만 남는 시대, 노동 없이도 존엄을 유지할 준비를 치열하게 해야 할 때다.

신동호 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