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전분당 이어 밀가루마저 담합…공정위 7개사에 6천억대 과징금

2026-05-20 12:00:03 게재

7개 제분사, 6년간 ‘밀가루 가격·물량’ 짬짜미 … 역대 최대 6710억 과징금

CJ제일제당·대한제분·사조동아원 등 ‘Big 3’ 주도, 하위사들 정보 구걸하며 가담

정부 물가안정 보조금 471억원 챙기면서 뒤로는 담합 지속 ‘도덕적 해이’ 극치

“라면·빵 가격 거품 걷어낸다” … 공정위,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 등 고강도 시정

서민 먹거리의 핵심 원재료인 밀가루 시장에서 무려 6년 동안 은밀하게 이어져 온 ‘거대 카르텔’의 실체가 드러났다. CJ제일제당을 포함한 국내 7개 주요 제분사가 가격을 올릴 때는 빛의 속도로, 내릴 때는 거북이걸음으로 조절하며 국민 주머니를 털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과거 설탕과 전분당 담합으로 홍역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세금으로 마련된 물가 안정 보조금까지 챙기며 담합을 지속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다.

특히 CJ는 설탕과 전분당에 이어 밀가루까지 담합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 ‘국민식탁 농단회사’란 오명을 쓰게 됐다.

발언하는 주병기 위원장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달 28일 공정거래위원회 조정원에서 열린 제3기 2030자문단 발대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시장점유율 90%의 횡포 = 20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국내 B2B(기업 간 거래) 밀가루 시장의 87.7%를 장악하고 있는 7개 제분사가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공급 가격과 물량을 담합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6710억4500만 원을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담합 사건 사상 역대 최대 규모다.

제재 대상은 씨제이제일제당(CJ)을 비록해 대한제분, 사조동아원, 삼양사, 대선제분, 삼화제분, 한탑 등 7개사다. 이들은 농심, 오뚜기, 파리바게뜨 등 대형 식품업체에 공급하는 가격은 물론, 중소 대리점과 외식업체에 공급하는 밀가루 가격까지 총 24차례에 걸쳐 조직적으로 맞췄다.

이번 담합의 시작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제분이 최대 수요처인 농심에 최저가를 투찰해 물량을 싹쓸이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사조동아원이 공격적인 영업을 펼치며 제분업계의 경쟁이 격화됐다.

영업이익이 깎일 것을 우려한 대한제분, CJ제일제당, 사조동아원 등 이른바 ‘Big 3’ 임원들은 2019년 11월 한 식당에 모였다. 이들은 “서로 과도한 경쟁을 자제하고 적정 가격을 유지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후 담합은 55회에 걸친 대표자와 실무자급 회합을 통해 고착화됐다. 상위 업체들이 큰 틀을 짜면, 삼양사 등 하위 업체들이 유선 연락이나 카카오톡 등을 통해 정보를 공유받으며 가담하는 방식이었다.

◆보조금 471억 챙기며 뒤로는 ‘담합 잔치’ = 이들의 담합 수법은 치밀하고 영악했다. 원재료인 원맥(밀) 가격이 상승하는 시기(2020~2022년)에는 “원가 상승분을 즉각 반영하자”며 일제히 가격을 올렸다. 담합 기간 중 밀가루 가격은 2019년 대비 최대 74%까지 치솟았다.

반면 원맥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선 2023년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대형 수요처인 농심 등이 가격 인하를 요구하자 제분사들은 모의를 통해 “인하 폭을 최소화하고 시기를 최대한 늦추자”고 합의했다. 실제로 농심이 1kg당 80원 인하를 요구했을 때, 이들은 담합을 통해 20원만 내리기로 입을 맞췄다. 가격 인하 소급 적용을 거부하는 전략까지 공유하며 부당 이득을 지켰다.

더 충격적인 대목은 정부의 물가안정대책을 농락한 ‘도덕적 해이’다. 정부는 국제 곡물가 폭등기였던 2022년 하반기, 밀가루 가격 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제분사들에 총 471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국민 세금으로 기업의 손실을 보전해준 것이다.

그러나 제분사들은 보조금을 수령하는 기간에도 담합 회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조금 수령 시점 이전에 미리 가격을 올려받는 방안을 논의하는 등 정부정책을 농락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도 뒤로는 담합을 지속해 경쟁을 소멸시킨 행위는 법 위반 정도가 매우 무겁다”고 강조했다.

◆CJ, 설탕·전분당 이어 밀가루까지 = 업계에서는 특히 CJ제일제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식품업계 공룡인 CJ제일제당은 과거 서민 생활의 필수품인 ‘설탕’과 ‘전분당’ 담합으로 이미 수차례 제재를 받은 전력이 있다. 이번 밀가루 담합까지 적발되면서, 사실상 ‘장바구니 물가’와 직결된 기초 식품 전 분야에서 담합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쓰게 됐다.

과거 제재를 받고도 또다시 담합의 굴레에 빠진 것은 기업 내부의 준법 감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들은 공정위 조사를 피하기 위해 업체별로 가격 인하 시기를 며칠씩 띄우는 이른바 ‘시차 두기’ 전략까지 짜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공정위는 이번 담합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조동아원에 1830억원, 대한제분에 1792억원, CJ제일제당에 1317억원 등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했다. 또 담합에 가담한 임직원 14명을 검찰에 고발 조치했다.

특히 이번 제재에는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이라는 강력한 시정조치가 포함됐다. 담합으로 왜곡된 현재의 밀가루 가격을 경쟁 질서가 살아있던 정상 수준으로 각사가 다시 결정해 보고하라는 것이다. 이는 향후 빵, 라면, 과자 등 밀가루를 원료로 하는 가공식품 전반의 가격 인하로 이어지는 ‘메기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국민 생활과 밀접한 기초 소재 분야의 독과점 구조가 담합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1차로 차단했다”며 “앞으로도 식료품 등 장바구니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카르텔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기업들에 ‘담합으로 얻는 이득보다 적발 시 치러야 할 비용이 훨씬 크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6년에 걸친 ‘밀가루 카르텔’의 붕괴가 고물가 시대를 견디고 있는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물가 하락의 온기로 전달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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