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그늘이 농사를 살린다

2026-05-27 13:00:03 게재

2024년 가을, 사과밭에는 햇볕에 데인 열매가 남았다. 폭염은 포도의 착색을 늦췄고, 배추 한포기 값은 9000원을 넘었으며, 인삼밭은 더 서늘한 곳을 찾아 점점 북쪽으로 밀려나고 있다. 기후가 농사를 흔드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야기 끝에 농지 위 태양광을 꺼내면 반응은 대개 둘로 갈린다. 농가의 부수입이라는 기대, 아니면 농지를 잠식한다는 우려. 둘 다 영농형 태양광을 너무 좁게 본다.

영농형 태양광을 발전설비로만 보면 관리하고 규제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농업 인프라로 보면 다른 물건이 된다. 핵심은 전기가 아니라 그늘이다. 작물은 일정한 빛의 양을 넘어서면 더 받아도 광합성을 늘리지 못한다. 남는 빛은 전기로 바꾸고 필요한 그늘은 농사에 돌려주는 장치. 그것이 영농형 태양광의 본래 얼굴이다.

그늘 아래에서는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한낮 열이 줄고, 토양수분 증발이 완화되며, 작물의 수분 스트레스도 낮아질 수 있다. 밤에는 복사냉각이 줄어 서리나 냉해 위험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 미국 애리조나의 건조지 실증에서는 패널 아래에서 칠테핀 고추 생산량이 크게 늘고, 토마토 등은 물 사용 효율도 개선됐다. 모든 작물에 같은 효과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온과 가뭄이 농사의 상수가 된 시대에 그늘이 농업기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농지 위 패널 아닌 패널 아래 채소 기르기

그늘은 농사의 적이라는 생각도 바꿀 때다. 더워진 기후에서는 오히려 필요한 그늘이 있다. 금산 인삼이 대표적이다. 인삼은 직사광선에 약해 70~80%를 가려 주는 차광막 없이는 자라기 어렵다. 농가는 해마다 차광막에 비용을 쓰지만 그 차광막은 아무 수익도 만들지 않는다. 이 그늘을 태양광 패널이 대신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용이던 그늘이 농사를 보호하고 전기도 생산하기 시작한다. 재배면적이 줄어드는 인삼밭에서 패널은 농사를 밀어내는 시설이 아니라 농사를 붙잡는 지붕이 될 수 있다.

해외사례의 공통점도 패널을 농지 위에 올렸다는 데 있지 않다. 콜로라도의 잭스 솔라 가든은 패널 아래에서 채소를 기르며 작물과 미세기후 변화를 연구한다. 프랑스 보르도와 남부 와인 산지에서는 포도밭 위 패널을 움직이며 폭염과 수분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실증이 이어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마다 규모 전망은 다르지만 세계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점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설치량보다 방향이다. 세계는 패널구조보다 작물생육 물관리 영농지속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물론 길을 잘못 들면 달라진다. 발전 수익만 쫓으면 작물재배는 형식이 된다. 수확량 기준을 맞춘다며 패널을 촘촘히 깔고, 그늘에 강한 작물만 골라 심는 방식은 영농형 태양광이 아니라 농지 위 발전사업에 가깝다. 일본의 시행착오도 여기에 있다.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규제완화가 아니다. 기준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패널을 몇 도로 세웠는가보다 그 아래에서 작물이 실제로 자라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수확량, 품질, 토양수분, 농작업 가능성, 영농 지속 여부를 데이터로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농지와 발전의 균형도 함께 세울 수 있다.

한국의 경쟁지점도 여기에 있다. 태양광 모듈 가격 경쟁은 중국이 앞설지 모른다. 그러나 영농형 태양광의 진짜 부가가치는 패널보다 최적화에 있다. 작물마다 다른 차광률을 설계하고, 토양수분과 빛의 양을 실시간으로 조절하며, 농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음을 데이터로 증명하는 일이다. 농학 기상학 구조공학 데이터기술이 만나는 이 영역은 한국이 충분히 승부를 걸 수 있는 분야다.

이 기술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온과 물 부족으로 농업 기반이 흔들리는 나라일수록 그늘과 물을 함께 다루는 기술은 절실하다. 아프리카와 중동, 동남아의 건조·고온 지역에서 영농형 태양광은 발전설비를 넘어 농업생산성을 지키는 기후적응 인프라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작물별 설계와 운영 기준을 축적한다면 그것은 장비수출을 넘어 기후위기 시대의 농업 협력 모델이 될 수 있다.

영농형 태양광, 규제 아닌 가능성의 눈으로

지난 5월 영농형 태양광 발전사업의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며 제도적 문도 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시선이다. 영농형 태양광을 농가의 부수입으로만 묶어 두면 그만큼만 자란다. 기후에 적응하는 농업 인프라로 보면 그 위에 산업과 수출, 국제협력까지 얹을 수 있다.

농지가 발전소로 바뀌지 않게 하려면 발전소를 농업시설처럼 설계해야 한다. 영농형 태양광의 성패는 패널의 숫자가 아니라 그 아래 작물이 자라는지에 달려 있다. 배추값에 놀라는 가을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제 그늘을 농사의 적이 아니라 농사를 살리는 기술로 볼 때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