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석 칼럼

각자도생과 연결의 역설

2026-06-02 13:00:01 게재

19세기 말 세계는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 있었다. 국제사회는 힘이 곧 질서였고, 약한 나라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일본은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그 배경에는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이라는 중요한 외교적 연결이 자리하고 있다.

영일동맹 체제 아래에서 러시아 함대는 수에즈 운하 이용과 보급에 여러 제약을 받았고, 러시아 함대는 멀리 희망봉을 돌아 극심한 피로 속에 쓰시마 해협에 도착해야 했다. 결국 일본은 승리했고 국제정치에서 ‘연결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세계에 보여주었다.

100년이 지난 오늘의 국제질서도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냉전 종식 이후 우리는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왔다. 국경은 낮아지고 하나의 시장을 지향하는 자유로운 경쟁의 시대였다. 국제법과 국제기구가 갈등을 조정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성은 점점 더 커져왔다. 실제로 세계화는 많은 나라에 번영을 가져왔고 대한민국은 그 흐름 속에서 세계 경제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최근 미국과 이란의 충돌은 국제질서의 불안정과 에너지 안보의 심각성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국제법과 규범은 아직 남아 있지만 현실의 세계는 다시 힘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다. 보호주의와 공급망 재편은 이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가 되고 있다.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시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유연하고 실용적 연결이 국가 경쟁력

이런 시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각자도생’이다.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조금과 관세정책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 역시 국가 주도의 산업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유럽 또한 경제안보라는 이름 아래 공급망 보호에 나서고 있다.

과거에는 효율성이 가장 큰 가치였다면 이제는 안정성과 통제력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이제 각국은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동맹의 범위를 좁히고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는 혼자만의 힘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모든 자원과 기술을 혼자 해결할 수는 없다. 기업 역시 독자적으로 공급망을 완성할 수 없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결국 ‘연결의 힘’이다. 과거처럼 이념과 명분만으로 국제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제는 얼마나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연결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동시에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는 지정학적 현실도 피할 수 없다.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더욱 치밀한 외교적 연결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기업 간 경쟁은 단순한 제품 경쟁이 아니다. 공급망과 공급망 간의 경쟁이 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 자동차, 그리고 전력기기를 비롯한 에너지 산업 모두 안정된 공급망 없이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공급망의 힘은 얼마나 많은 경제주체가 서로 신뢰 속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최근 세계 각국이 공급망을 전략자산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가 안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며, 기업 성과가 사회 전체와 균형 있게 나누어질 때 공급망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특히 수출 중심 경제인 우리에게 연결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해외시장에 진출할 때는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고, 국내 산업을 지키기 위해서도 기업과 지역사회, 노동과 자본 사이의 연결이 중요해지고 있다.

파편화되는 글로벌 환경에서 민관이 한 몸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고립될 수밖에 없다. 기업 역시 단순히 이윤만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의 삶과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각자도생 시대를 넘길 ‘연결의 역설’

각자도생의 시대는 냉혹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시대는 더 강한 연결을 요구한다. ‘연결의 역설’이다. 자국 우선주의와 경제안보 기조 속에서 칩4 동맹,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등 기술·경제 중심의 다자연대가 새로운 공급망 안보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블록화 환경에서는 선별적이고 긴밀한 다층적 협력망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실리적 안보를 도모할 수 있다.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누가 더 강한 힘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넓고 깊은 연결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HD현대 커뮤니케이션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