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 확대…한국은 ‘걸음마’

2026-06-08 13:00:02 게재

국제사회 네이처아이디 등 디지털 신뢰 구축 논의 활발 … 이중판매 등 탄소시장 문제 되풀이해선 안 돼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탄소 크레디트 시장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이중계산이나 판매, 위장환경주의(그린워싱)와 같은 문제로 신뢰성이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에서는 생태계·종·서식지에 고유 식별자를 부여하는 ‘네이처 아이디(Nature ID)’ 체계와 ‘환경 DNA(eDNA)’ 기술을 결합해 크레디트의 실제 보전 성과를 실시간으로 추적·검증하는 새로운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8일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얼라이언스(BCA)’의 ‘디지털 네이티브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의 기반: 디지털 신뢰 인프라 통합’ 보고서에 따르면,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이 신뢰를 얻으려면 처음 설계 단계부터 조작·이중판매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블록체인 디지털 기반시설 위에 구축돼야 한다. 전통적인 기록 방식으로는 생물다양성 크레디트에 요구되는 △투명성 △검증가능성 △비교가능성 △감사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 형성 초기 단계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 설계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치기가 훨씬 어렵다는 지적이다.

BCA는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CBD COP15) 기간 중 각국 정부와 기업, 토착민 단체 등이 참여해 비공식 그룹으로 출범했다. △과학 기반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원칙 체계를 만들고 △시장 참여자들이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안내를 하는 게 목표다.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 신뢰성 확보를 위해 디지털 기반 데이터 표준화를 위한 논의가 국제 사회에서 활발하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데이터 표준화와 eDNA로 신뢰성 확보 = 생물다양성은 △종 다양성 △생태계 기능 △위협 요인 감소 등 다중적인 지표를 활용해 측정된다. 또한 △현장 조사 △위성 원격탐사 △eDNA △지역 공동체 관찰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태생적으로 탄소 데이터보다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료 조작이나 과장 등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BCA 보고서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 형식의 통일과 △네이처 아이디와 eDNA의 결합을 제언했다. 생물다양성 데이터는 플랫폼 혹은 국가마다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수집·저장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숲 A를 두고 기관 혹은 국가별로 서로 다르게 표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B기관은 위도와 경도로 △C기관은 행정구역명으로 △D기관은 샘플 코드로 A를 표기한다면 이 정보를 활용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서로 다른 장소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중계산 등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BCA는 이를 막기 위해 생물다양성 데이터를 수집·저장하는 방식을 국제 공통 표준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세계 어느 플랫폼에서 만든 크레디트든 같은 기준으로 읽히고 비교·검증될 수 있도록 데이터 구조를 국제 공통 표준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어떤 정보를 담을지’ 큰 틀을 정하는 데이터 모델 △‘그 정보를 어떤 형식으로 저장할지’ 세부 규격인 스키마 △‘용어를 통일하는’ 분류 체계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온톨로지 등을 국제 표준으로 맞추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집된 데이터도 활용 가능하다는 소리다.

BCA는 네이처 아이디와 eDNA 결합도 제언했다. 네이처 아이디는 생태계·종·서식지 각각에 전세계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고유 번호를 부여하는 체계다. 숲 A에 고유 번호가 부여되면 조사 방법과 관계없이 모두 같은 곳이라는 걸 시스템이 자동으로 알 수 있다. 데이터 형식 통일이 ‘그릇 모양을 맞추는 것’이라면, 네이처 아이디는 ‘그릇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BCA는 적어도 이 2가지가 함께 갖춰져야 숲 A에 대한 크레디트가 이중으로 발행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여기에 eDNA까지 접목되면 신뢰성 담보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게 보고서의 내용이다. 네이처 아이디로 식별된 특정 생태계에 eDNA 모니터링을 연결하면 크레디트가 발행된 이후에도 실제 보전 성과가 유지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레디트를 팔고 나서 관리가 소홀해지는 문제, 이른바 ‘사후 위장환경주의’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생기는 셈이다.

해외에서는 환경DNA를 활용한 사후 관리 방안을 마련 중이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동아시아는 시장 설계보다 데이터·제도 구축이 먼저” = 이처럼 국제 사회에서는 생물다양성 크레디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국내는 걸음마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일 박찬호 전남대 수산과학연구소 박사는 “선진국들이 유럽·중남미·아프리카를 대상으로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성공사례를 활발히 만들어가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과학자와 정책입안자 모두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은 상황”이라며 “기술 자체보다 데이터·수요·제도 기반이 모두 미성숙한 상태에서 시장 설계를 먼저 논의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재 상태를 진단하지 않고 ‘좋은 건 좋은 것’이라는 속도감만 앞서는 것은 위험하다”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적 시사점은 시장 설계보다 데이터와 민관협력 구축이 최소 5~10년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0년 나고야 의정서 채택 당시 일본이 ‘사토야마 이니셔티브’를 제안했지만 지나치게 일본 중심적이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이후 국제사회는 이를 ‘사회생태적 생산경관(SEPL)’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박 박사는 “SEPL 개념으로 가면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문화·전통 지식까지 생태계 측정 지표에 담을 수 있다”며 “생산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 지역들이 생태계 유지에 얼마나 기여해 왔는지를 체계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프리프린트 플랫폼 ‘오서리아(Authorea·동료 심사 전 논문을 미리 공개하는 온라인 플랫폼)’에 공개된 논문 ‘아시아의 핵심 생물다양성·생태계서비스 변수 이행의 과제와 전망’에 따르면, 실제로 아시아에는 아직 학명조차 붙지 않은 미발견 생물종이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현행 생물다양성 측정 체계는 이미 기록된 종만 세기 때문에 조사가 덜 된 지역일수록 생물다양성이 실제보다 낮게 집계되는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의 마을숲이나 다랑이 논처럼 오랜 전통 방식으로 유지돼 온 경관 역시 생물다양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데도 국제 분류 기준상 훼손지로 분류돼 보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역설이 생긴다. 이런 아시아의 특수성을 반영하려면 기존 측정 체계를 손보거나 새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될 데이터 자체가 미흡한 상황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연구자들이 eDNA 기반 생물다양성 측정·분석을 사업화해 국제기구에는 무료로, 생물다양성 순증(net gain)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기업들에게는 유료로 과학적 증빙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

용어설명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 특정 지역에서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거나 복원한 성과를 측정·인증해 거래 가능한 단위로 만든 시장 기반 수단이다. △종 다양성 △서식지 면적 △생태계 기능 등을 지표로 삼아 성과를 수치화한다. 크레디트를 구매한 기업이나 기관은 자연 훼손에 대한 상쇄 또는 자발적 기여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2022년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GBF)’ 채택 이후 국제 논의가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객관적 측정 방법론과 국제 표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다.

■탄소 크레디트 = 온실가스 배출량을 1톤(이산화탄소 환산 기준) 줄인 성과를 인증한 거래 가능한 단위다. 기업이나 국가 등 온실가스를 감축하거나 흡수한 주체가 크레디트를 발행 받아 배출권이 필요한 다른 주체에게 팔 수 있다. 정부가 배출 한도를 설정하고 기업 간 거래를 허용하는 의무적 탄소시장 성격의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와 기업이 자발적으로 탄소중립 목표를 이행하기 위해 크레디트를 구매하는 자발적 탄소시장 등이 있다.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 = 유엔 생물다양성협약(CBD) 체결국들이 모여 글로벌 생물다양성 보전 목표와 이행 방안을 논의하는 최고 의사결정 회의다. 2022년 12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다. 2030년까지 전세계 육지와 바다의 30%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30×30’ 목표를 핵심으로 하는 GBF가 채택됐다. GBF 채택을 계기로 △기업의 자연 관련 정보 공시 의무화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 형성 등 민간 자금을 자연 보전에 끌어들이는 논의가 본격화됐다.

■환경DNA = 유기체가 물 토양 공기 등에 남긴 세포·점액·배설물·털 등에서 유래한 유전물질이다. 포획하거나 육안으로 관찰하지 않아도 해당 지역에 어떤 생물이 존재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나고야 의정서 = 2010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10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COP10)에서 채택된 국제 협약이다. 특정 국가의 생물자원을 연구·상업적으로 활용할 경우 해당 자원 제공국의 사전 동의를 얻고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한다. 2014년 발효됐으며 대한민국은 2017년 비준했다. 생물다양성 크레디트 시장이 확대될수록 유전자원 접근·이익 공유 문제와의 연계성이 높아져 나고야 의정서의 중요성도 함께 커진다.

김아영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