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개입·국민연금 환헤지 가동으로 환율 급등세 막았지만

2026-06-09 13:00:15 게재

환율, 금융위기 후 최고치 깨 … ‘경상 흑자 속 원화 약세’ 미스터리

외국인 60조 팔고·기업은 달러 쌓고 … 외환시장 구조적 변화 직면

원달러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며 금융시장을 흔들고 있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라는 탄탄한 경제기초체력(펀더멘털)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는 연일 곤두박질쳤다. 외국인의 전례 없는 주식 매도 폭탄과 국내 투자자·기업들의 달러 선호 경향이 맞물린 결과다.

외환당국의 강력한 구두개입과 국민연금의 대규모 선물환 매도가 동원되면서 급등세는 일단 진정됐다. 하지만 미국 통화정책 불확실성과 중동 정세 불안 등 대외 악재가 겹겹이 쌓여 있어 환율 시장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7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재정경제부 제공

◆야간 거래서 숨고르기 = 9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전날 장 초반 1555.2원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이후 17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환율 상단이 1600원선까지 열려 있다는 공포감이 확산됐다. 5거래일 만에 원화 가치가 달러 대비 3.3% 급락하면서 외환시장이 급격히 동요했다.

폭주하던 환율을 멈춰 세운 것은 외환당국과 국민연금의 공조였다. 정부의 강도 높은 개입이 이어지며 주간 거래는 1535.0원에 마감했다. 이어 열린 야간 거래에서는 낙폭을 더 키웠다. 9일 새벽 2시 마감한 야간 거래에서 원달러 환율은 주간 거래 종가보다 8.5원 더 떨어진 1526.5원에 거래를 마쳤다.

최고점 대비 30원 가까이 밀려나며 급한 불은 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하루 장중 고점(1555.2원)과 저점(1525.9원)의 차이인 변동폭은 29.3원에 달할 만큼 극심한 혼조세를 보였다. 총 현물환 거래량은 166억5500만달러로 집계됐다. 지난달 21일 이후 처음으로 하루 거래량이 200억달러를 밑돌며 시장 참가자들이 관망세로 돌아선 모습을 보였다.

◆깨져버린 환율 공식 = 최근 고환율 현상은 한국 경제의 전통적인 매커니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수출이 늘고 경상수지 흑자가 누적되면 국내에 달러 공급이 넘쳐 원화 가치가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이다. 한국은 현재 사상 최대규모에 근접한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원화 값은 이와 무관하게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외환당국과 전문가들은 외환시장의 수급 구조가 자무역(통상) 중심에서 금융계정(자본이동)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가장 직접적인 폭탄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코리아(Sell Korea)’였다.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고치로 치솟자 외국인들은 대대적인 차익 실현과 포트폴리오 비중 조정에 나섰다. 외국인은 지난달 7일부터 전날까지 21거래일 연속 매도 행렬을 이어갔다. 이 기간 순매도 규모만 77조6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지난 3월 36조원, 5월에 45조원을 쏟아낸 데 이어 6월 들어서도 단 5거래일 만에 19조원어치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달러로 환산하면 수백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빠져나가며 원화를 달러로 바꾸려는 수요를 폭발시켰다.

국내 투자자들의 외화자산 선호, 일명 ‘서학개미’ 열풍도 장기적인 원화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 직접투자와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해외 자산 비중 확대가 구조적으로 국내 저축을 해외로 유출시키며 달러 수요를 상시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출 기업들의 매매 행태 변화도 달러 가뭄을 부추겼다. 2017년 외국환거래법 개정으로 수출대금 회수 의무가 폐지되면서 기업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곧바로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외화예금에 쌓아두기 시작했다. 환율이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되자 수출기업은 환전을 미루고(래그), 수입기업은 환율이 더 오르기 전에 달러를 미리 사는(리드) ‘리드-래그’ 현상이 심화됐다. 기업들의 외화예금 잔액이 사상 최고치 수준에 육박하면서 정작 외환시장에 돌 돈이 마르는 왜곡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 외환당국 설명이다.

◆구두개입에 국민연금 카드까지 = 환율이 대내외 악재를 타고 1600원선을 위협하자 외환당국은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총력 대응에 나섰다.

먼저 정부는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긴급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소집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등 이른바 ‘F4’ 수장들이 모두 모여 시장 쏠림 현상에 엄정 조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어 한국은행과 재정경제부는 국장급 공동 명의의 구두개입 메시지까지 추가로 발표했다. 이형렬 재경부 국제금융국장과 윤경수 한은 국제국장은 공동 언론공지를 통해 “최근 환율 상승은 수급 요인 외에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등 일부 투기적 거래가 변동성을 키운 결과”라고 정조준했다. 또 “펀더멘털 대비 과도한 변동성과 일방향 쏠림을 결코 용인하지 않고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 기관이 공동 구두개입에 나선 것은 지난해 12월 이후 6개월 만이다.

환율대응은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정부는 국민연금공단을 구원투수로 등판시키는 ‘뉴프레임워크’ 전략을 가동했다. 국민연금은 올해 초 이후 중단했던 환헤지(환율 변동 위험 방어)를 전격 재개하며 선물환 매도 포지션을 취했다. 국민연금이 대규모로 달러를 파는 선물환 매도 물량을 공급하자 외환시장에는 당국의 실물 개입과 같은 강력한 효과가 나타났다. 시장 참가자들은 국민연금이 1550원대 후반을 환율의 단기 고점(상단)으로 확고히 인식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이는 환율 급등세를 꺾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역외 NDF 시장에 대한 제도적 정비도 추진된다. 당국은 NDF 시장의 투기 거래가 서울 외환시장의 시작가를 무조건 끌어올리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을 막기 위해 역외 물량을 국내 직거래(DF) 시장으로 유도하는 인센티브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아울러 외국환은행에 대한 서면검사를 통해 투기성 교란 행위를 잡아내고 기업들의 환전을 독려할 계획이다.

◆체질 개선 기회로 삼아야 = 반면 현재의 고환율을 과거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의 시스템 붕괴 징후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메리츠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현 사태가 달러 국가신인도나 유동성 부족이 아닌 국내 자금의 자발적 보유 확대에 따른 현상인 만큼 수 주 내 수개월 안에 리스크가 진정되면 1500원 아래로 반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당면한 고환율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시장 안정화 조치를 넘어 외환시장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외국인 매도세가 상당 부분 진행돼 추가 이탈 여력이 제한적이라고 보지만, 근본적인 자금 유입을 유도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 한국 증시의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논의를 본격화해 안정적인 글로벌 자금을 유치하고, 기업들이 보유한 막대한 외화예금이 적기에 외환시장에 매물로 공급될 수 있도록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의 환율 급등은 한국 금융시장의 매력도와 자본 이동의 구조적 변화를 보여주는 아픈 지표라는 점에서 외환당국의 보다 정교하고 근본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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