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폭등 억제해온 ‘3대 완충장치’ 흔들린다
미국 수출 확대·중국 수요 둔화·호르무즈 우회 물량 한계 임박
유가하락 ETF서 사상 최대 자금 이탈 … 유가상승 펀드로 유입
미국·이란 전쟁 장기화에도 국제유가 급등을 막아온 완충장치들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유가 하락에 베팅했던 투자자들이 대거 시장을 이탈하면서 향후 원유시장의 변동성이 한층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9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6월 첫째주 투자자들은 유가하락시 수익을 얻는 레버리지 인버스 상품 ‘프로셰어즈 울트라숏 블룸버그 크루드 오일 ETF’에서 약 2억2000만달러(약 3361억원)를 회수했다. 이는 해당 상품 출시 이후 최대 규모의 주간 자금 유출이다.
반면 유가 상승에 투자하는 ‘유나이티드 스태이츠 오일 펀드’와 ‘브렌트 오일 펀드’에는 자금이 유입됐다. 시장 참가자들이 유가하락보다 상승 가능성을 더 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원유공급 불안 우려 다시 커져 = 이번 자금 이동은 글로벌 원유 재고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는 시점과 맞물린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이 사실상 차질을 빚으면서 시장의 공급 불안 우려가 다시 커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중동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동안 유가인상을 억제할 수 있었던 이유로 △미국의 사상 최대 원유 수출 △중국의 예상 밖 수요 둔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제한적 공급 지속 및 우회로 확보 등 세 가지 요인을 꼽는다.
전쟁 이전 시장에는 상당한 규모의 잉여 재고가 존재했고, 여기에 미국이 대규모 증산과 수출 확대로 공급 공백을 메우면서 시장충격을 흡수했다.
미국의 원유 및 연료 수출량은 5월 기준 지난해 평균보다 하루 200만배럴 이상 증가했다. 셰일혁명 이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현재 사실상 글로벌 원유시장의 핵심 ‘스윙 공급국’(시장을 안정시키는 완충역할을 하는 공급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 변수도 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에너지 데이터기업 보텍사에 따르면 중국의 5월 원유 수입량은 지난해 평균보다 약 40% 감소했다. 이는 중동 공급 차질로 발생한 손실물량의 상당부분을 상쇄할 수 있는 규모다.
중국의 원유수요 감소는 전략비축유 매입 축소, 석탄 기반 화학산업 확대, 전기차 보급에 따른 휘발유 소비 감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시장조사업체 케플러와 에너지 어스펙츠는 중국의 5~6월 원유 정제 처리량도 하루 약 1300만배럴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평균인 1480만배럴보다 12.2% 감소한 수치다.
◆원유 재고, 사상 최고수준 감소 = 그러나 시장에서는 이러한 완충장치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전망한다.
세계 원유 재고는 현재 사상 최고 수준의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매주 7000만~8000만배럴 규모의 재고가 줄어드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규모 원자재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핌코의 그레그 셰어나우 투자책임자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와 같은 재고감소 추세는 장기간 지속될 수 없다”며 “몇 달 안에 시장의 완충능력이 사실상 소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는 최근 20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략비축유(SPR) 역시 과거 대규모 방출로 인해 추가 활용 여력이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원유가격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오클라호마주 쿠싱 저장시설 재고도 운영상 최소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름철 전력수요 증가와 휴가철 차량 이동 확대까지 겹치면서 미국 정유사들은 원유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산 원유의 아시아 인도 가격은 중동산 대비 프리미엄이 확대되는 추세다.
◆중국 원유수입 회복여부가 핵심 변수 = 시장 전문가들은 향후 유가방향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중국의 원유수입 회복 여부를 지목한다.
중국에서 경기부양 정책 강화나 산업활동 회복으로 원유수입을 정상화할 경우 글로벌 원유 수급은 급격히 타이트해질 수 있다. 특히 중동 공급 차질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중국 수요가 회복되면 현재 시장을 지탱하고 있는 공급·재고 완충장치가 빠르게 소진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미국의 수출 확대 여력이 제한되고 글로벌 재고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공급 충격까지 발생할 경우 국제유가는 예상보다 훨씬 큰 폭의 상승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진 미국 수출 확대와 중국 수요 둔화가 유가 폭등을 막아왔지만 두 요인 모두 지속 가능성이 약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공급망 인프라 여유가 사라지고, 시장 유연성이 고갈된 현 상황에서는 미미한 공급차질이나 지정학적 불씨만으로도 유가 급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