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부족 사태’ 후폭풍 커진다
잠실에선 재선거 요구 시위 확산 … 2030 주도 자율집회
검경 합수본 구성, 수사 착수 … 선관위 책임 규명 본격화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단순 행정 실수를 넘어 선거 신뢰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 송파구 잠실 개표소 주변에서는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봉쇄 시위가 나흘째 이어지고 있고, 정부는 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 구성을 지시하며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론과 함께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시민행동이 등장하면서 민주주의 절차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도 커지는 양상이다.
8일 경찰과 선관위 등에 따르면 잠실 개표소로 사용됐던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주변에는 이날 새벽(0시 기준)에도 경찰 비공식 추산 8000여명이 남아 집회를 이어갔다. 전날 오후 한때 참가자는 2만명을 넘기도 했다.
이번 시위는 지난 3일 본투표 당시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서 시작됐다. 일부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 끝에 투표하지 못하거나 투표를 포기하면서 참정권 침해 논란이 불거졌고, 참가자들은 재선거 실시와 선관위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선관위가 선거 당일 예상 투표 수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단순한 업무 착오를 넘어 선거관리 체계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 “부정선거 아닌 참정권 문제” = 이번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한 주최자가 없는 자율형 집회라는 점이다. 참가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였고, 손글씨 피켓과 태극기를 앞세워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카페 선결제와 간식차, 음료·보조배터리 기부도 이어졌다. 서울시 실시간 도시 데이터에 따르면 올림픽공원 일대 인구의 절반 이상은 20·30대로 나타났다.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집회의 성격을 둘러싼 내부 논쟁도 나타나고 있다. 초기에는 일부 정치인과 유튜버들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참여했지만 최근에는 “핵심은 부정선거가 아니라 참정권 침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성조기 사용 자제와 재선거·참정권 중심 구호를 요구하는 손글씨 안내문도 등장했다.
실제 현장에서는 성조기 사용과 부정선거 구호를 둘러싼 언쟁이 벌어졌고, ‘부정선거 사형’이라고 적힌 깃발 철거 문제로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청년층 참가자들이 정파적 구호보다 참정권 침해와 선거관리 실패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기존 강경 보수집회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정치권이나 특정 진영의 이해관계보다 투표권 행사 자체가 제한됐다는 점에 주목하는 참가자들이 늘면서 집회의 문제의식도 선거 절차의 공정성과 신뢰 회복에 맞춰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장에서는 특정 정치세력이나 유튜버의 개입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온 유튜버 전한길씨 등이 집회 방향을 놓고 일부 참가자들과 의견 차이를 보였고,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현장을 찾았다가 일부 참가자들의 반발을 받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정당이나 정치인보다 사태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위 문화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현장 곳곳에는 “평화를 지켜달라” “선동하거나 당하지 말라”는 문구가 등장했고, 참가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경찰과의 충돌이나 마찰을 자제하자는 지침을 공유하고 있다. 집회 초기의 강한 반발과 달리 최근에는 평화적 집회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 선관위 책임 규명 본격화 = 거리에서 재선거 요구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의 진상 규명 작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7일 검찰과 경찰이 참여하는 합동수사본부 구성을 지시했고, 대검찰청도 경찰과 협력해 국민적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경찰에는 시민단체 등이 선관위 관계자들을 직무유기 혐의 등으로 고발한 사건이 접수돼 있다. 합수본은 투표용지 부족 경위와 의사결정 과정, 선관위 대응의 적절성 등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전망이다. 수사 과정에서는 투표용지 수요 예측과 인쇄 물량 결정, 현장 배포 체계가 적절했는지와 함께 선관위 내부 보고·대응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도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서는 형사처벌 여부가 고의성 입증에 달려 있다고 본다. 선관위 관계자들이 유권자의 투표를 방해할 의도로 투표용지를 부족하게 준비했다는 점이 확인돼야 직무유기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업무상 과실이나 준비 부족만으로는 직무유기죄 적용이 쉽지 않은 만큼, 합수본은 투표용지 수량 산정과 인쇄·배부 과정의 의사결정 경위를 집중적으로 조사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의성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선관위의 과실이 인정되면 징계나 국가배상 책임 문제는 별도로 제기될 수 있다. 실제 법원은 과거 공무원의 과실로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 유권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번 사태는 선관위 책임 규명을 넘어 선거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서 촉발된 잠실 시위와 검경 합동수사가 맞물리면서 논란은 선거관리 실패를 넘어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신뢰 문제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장세풍·이재걸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