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진단도 뒤집는 보험사 의료자문
지급 거절 10건 중 7건 ‘주치의 진단·치료 불인정’
의료자문 관련 분쟁 절반 육박 … 제도 개선 요구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소비자 분쟁의 상당수가 보험사의 의료자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보험금 지급 거절 사건 2건 중 1건 가까이가 의료자문과 관련된 분쟁이었다. 특히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포함한 종합병원 진단까지 보험사가 재검증 대상으로 삼으면서 의료자문 제도가 보험금 지급 심사의 객관성을 높이는 장치인지, 지급 거절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인지 논란이 커지고 있다.
7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보험 관련 피해구제 신청은 930건이었다. 이 가운데 798건(85.8%)은 보험금 지급 거절로 발생한 분쟁이었다. 최근 5년간 보험 관련 피해구제 신청은 모두 4560건으로 집계됐다.
보험금 지급 거절 사유로는 ‘주치의 진단·치료 불인정’이 538건(67.4%)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약관 적용 이견 165건(20.7%), 손해액 이견 72건(9.0%) 순이었다. 보험금 분쟁 10건 중 7건이 의료 판단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된 셈이다.
특히 주치의 진단이나 치료를 인정하지 않은 538건 가운데 377건(70.1%)은 의료자문과 관련된 분쟁이었다. 이는 전체 보험금 지급 거절 사건의 47.2%에 해당한다. 보험금 지급 거절 사건 2건 중 1건 가까이가 의료자문과 연결돼 있는 것이다. 의료자문은 환자를 직접 치료한 의사의 진단이나 치료가 적절했는지 제3의 전문의에게 의견을 구하는 절차다. 보험사는 소비자 동의를 받아 의료자문을 진행한 뒤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한다.
소비자원 분석 결과 보험사가 의료자문을 요구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 377건 가운데 145건(38.5%)은 종합병원급 의료기관 소속 의사가 진단한 사례였다. 병원급은 118건(31.3%), 의원급은 114건(30.2%)이었다.
특히 종합병원급 사례 145건 가운데 99건은 의과대학 부속병원 진단이었다. 보험사가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대학병원 진단까지 재검증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피해 사례도 적지 않다. 한 가입자는 대학병원에서 자기공명혈관조영술(MRA) 검사를 받고 경동맥 폐쇄·협착 진단을 받아 뇌졸중 진단보험금을 청구했다. 그러나 보험사는 유의미한 혈관 협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가입자가 의료자문 시행에 동의할 때까지 보험금 심사 절차를 중단하기도 했다.
또 다른 가입자는 요추 추간판탈출증과 신경관협착증 진단을 받고 입원해 풍선확장 신경성형술을 받았다. 이후 입원 실손의료비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보험사는 의료자문 결과를 근거로 입원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환자를 직접 진료한 의료진의 판단과 보험사가 의뢰한 의료자문 결과가 충돌하면서 분쟁으로 이어진 사례다.
이 단체는 대한정맥학회와 서울대병원 의료진의 문제 제기를 인용해 자문의가 작성한 의견서에는 치료의 적정성이 인정됐지만 소비자에게 전달된 통지문에는 치료 필요성을 부정하는 취지의 내용이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의료진은 자문의 의견이 전달되는 과정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해당 단체는 변경 주체가 보험사인지 중개업체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보험사가 의료자문을 이유로 지급하지 않은 보험금 규모도 적지 않았다. 평균 거절 금액은 1618만원이었다. 금액별로는 1000만원 이상~3000만원 미만이 39.1%로 가장 많았다. 단순 민원을 넘어 가계 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의 분쟁이라는 의미다.
의료자문 제도는 보험사기나 과잉진료를 걸러내고 보험금 지급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소비자원은 현재 운영 중인 ‘의료자문 내부통제 기준’만으로는 남용을 막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는 2021년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했지만 의료자문 실시 대상과 요건이 구체적이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비자원은 보험업계에 의료자문 내부통제 기준 개선을 요청할 계획이다. 환자·소비자단체들도 의료자문 원본 공개, 자문의 실명제 도입, 보험사로부터 독립된 제3자 의료심사·심의기구 설치, 자문서 수정·편집 이력 공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조사 결과는 보험금 분쟁의 상당 부분이 약관 해석보다 의료 판단과 의료자문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험사기 방지와 객관적 심사를 위해 도입된 의료자문 제도가 보험금 지급 거절의 핵심 근거로 활용되면서 소비자 불신도 커지고 있다. 의료자문이 객관성 확보 장치인지 보험금 지급 거절 수단인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료자문 범위와 절차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가 보험 분쟁 제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