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투자 붐이 인플레이션 위험 확대시켜”
물가 하락 기대했는데 오히려 상승 압력 높여
연준 금리 인하 명분 사라지고 인상 가능성 ↑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를 웃돌 전망이 확산되는 가운데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인플레이션 위험을 자극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AI로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물가를 낮출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대규모 AI 투자 붐이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인프라에 대한 수요를 급격히 끌어올리면서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AI가 단기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거대한 부메랑으로 돌아온 모습이다. 이에 따라 AI의 장기 생산성 효과에 근거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명분은 약화되고 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졌다.
◆5월 물가상승률 4.3% 전망 =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전일 뉴욕 증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교전 잠정 중단 소식과 반도체주 저가 매수세에 힘입어 소폭 상승했다. 하지만 국채금리는 여전히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날 10년 만기 미 국채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3bp(1bp=0.01%p) 오른 4.56%를 기록했다. 30년 만기 미 국채금리는 5.04%로 전일 대비 4bp 올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채권 거래자들은 소비자물가지수(CPI)와 연관성이 높은 인플레이션 스왑 거래에서 연간 약 4.3%의 물가상승률을 예상했다. 이는 2023년 이후 최고치다. 시장에서도 10일(현지시간) 발표될 5월 CPI 상승률이 4.2%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블룸버그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다는 신호가 늘어날수록 연준이 기존의 통화정책 경로를 변경해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철회할 수 있다”며 “일부 투자은행은 0.5~0.75%p 수준의 금리 인상을 전망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유가상승·AI 인프라 투자 확대 원인 = 최근 미국에서는 중동발 유가 상승과 함께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인플레이션 재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시장에서는 AI를 통해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향상되며 디스인플레이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해 왔다. 실제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은 AI 혁신이 생산성을 높여 물가를 안정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금리 인하 논리를 제시해 왔다. 워시 의장은 취임 전인 작년 11월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를 통해 “연준이 AI 혁신에 따른 생산성 향상과 디스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 둔화) 효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물가 지표가 완연한 반등세를 보이면서 시장의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유가 상승에 더해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반도체와 전력 등의 수요를 급격히 확대시키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대두되는 상황이다. AI의 생산성 효과가 실현되기 전에, 막대한 인프라 투자 수요가 먼저 실물경제를 덮치며 물가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AI발 수요 충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 전 ‘비용’이 먼저 물가 자극 =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AI 경쟁력 확보를 위해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력망, 발전설비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올해에만 AI 관련 기업 투자 규모가 8000억달러를 넘어서고, 향후 수년간 수조 달러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권도현 국제금융센터 뉴욕사무소 소장은 “현재 미국 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AI 도입 초기 비용과 인프라 투자 수요가 먼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기술 혁신이 실제 기업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 제품 가격을 낮추기까지는 조직개편, 데이터 인프라 구축, 시스템 통합 등 방대한 선행 투자가 필수적인데 이 과정에서 초기에는 비용만 많이 들고 생산성 증가는 뒤늦게 나타나는 ‘생산성 J-커브’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I가 만든 새로운 물가 압력 = 반도체 가격 상승도 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AI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GPU와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관련 부품 가격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미국의 전자부품 및 액세서리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지난 4월 전년 동기 대비 28% 상승했다. CPI 항목 가운데 ‘컴퓨터 소프트웨어 및 액세서리’ 가격도 최근 1년간 14% 올라 통계 작성 이후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해당 품목은 근원물가 내 비중은 크지 않지만 최근 수개월간 물가 상승분의 상당 부분을 견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전력 수요 급증 역시 새로운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지난해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전기요금 상승은 물론 발전설비와 송전망, 냉각장비 등 연관 산업 전반의 투자 수요도 확대되고 있다.
◆연준 통화정책 딜레마 커져 = 권 소장은 “AI 낙관론이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는 자산효과도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지목했다. AI 기술이 미래 생산성을 크게 높일 것이라는 기대가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를 확대시키면서 총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 연방은행들은 AI 투자 확대가 초래하는 단기 물가 압력이 연준의 통화정책 운신 폭을 제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은 “AI의 장기 생산성 효과에 근거한 연준의 금리 인하 명분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생산성 향상 효과가 실제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AI 투자 확대가 유발하는 단기 인플레이션 압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무살렘 세인트루이스 연은 총재는 “생산성 향상 기대만으로 현재의 인플레이션 문제를 낙관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통화정책은 강한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욕 연은 또한 “AI 도입 초기 미래 생산성 기대가 자산 가격을 높이고, 생산성 향상이 실제 나타나기 전부터 현재의 지출을 뒷받침하면서 수요 측면의 압력이 형성된다”고 지적했다.
권 소장은 “AI의 중장기 생산성 향상 효과가 실제 확인되기 전까지는, AI 투자 확대가 유발하는 단기 물가 압력과 이에 따른 통화정책 제약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며 “고금리와 고비용 부담이 누적될 경우 AI 투자 수익성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이 취임 후 처음 주재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16~17일)를 앞두고 공개적으로 금리 인하를 촉구했다. 시장이 금리 인상 가능성을 반영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정반대 방향의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연준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도 다시 불거지고 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