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지 부족 사태 원인규명 속도
검경 합수본 출범 … 고의성 여부 확인 촉각
법원, 송파 투표소 CCTV 등 증거보전 명령
지역선관위-중선관위, 내부보고 지연·무응답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사태의 원인 규명을 위한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출범했다. 법원도 투표일 당시의 혼란상 파악을 위한 증거보전 명령을 내렸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현장 투표소의 용지 부족 보고를 받고도 내부보고 및 대응에 하세월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선관위 직원 소환 일정조율 = 대검찰청은 9일 “검찰과 경찰은 지난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국민의 참정권 행사에 지장이 초래된 사안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규명하기 위해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설치키로 했다”고 밝혔다.
합수본은 검찰 12명, 경찰 15명 등 총 27명 규모로 구성된다. 본부장에는 ‘공안통’ 김태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부본부장에는 공공·부패범죄 분야 경험이 많은 고태완 충남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 실장(총경)이 임명됐다.
경찰은 이 밖에도 경정 1명과 경감 이하 13명을 합수본에 파견한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7일 엑스(X·옛 트위터)에서 “검찰과 경찰이 참여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사건의 전모를 철저히 규명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후 검경은 실무 협의를 거쳐 이 대통령 지시 이틀만인 이날 합수본 인력 구성과 규모 등을 확정했다. 사무실 이전 및 기록 검토 등에 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 수사 시작까지는 다소 시간이 더 걸릴 전망이다.
합수본 수사의 초점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고의성 여부인 것으로 분석된다.
선관위측이 투표 방해를 위해 일부러 투표지를 적게 인쇄하거나, 일부러 추가 투표용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직무유기 혐의가 적용 가능하겠지만 그저 무능하거나 직무에 태만했다면 형사처벌보다 기관 내 징계 수준의 조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뒤늦게 투표용지를 배부하면서 발생한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 투표지 부족 사태에 대해 축소·은폐 시도 여부도 관심이다.
이밖에 인천·호남 등 10여개 지역의 사전투표에서 주요 후보들의 득표수가 완전히 똑같았다는 ‘동일 투표’ 의혹도 수사선상에 오를 수 있다.
한편 경찰은 합수본 출범에 앞서 선관위 직원들에 대한 조사를 최대한 진척시키려는 모습이다.
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광역범죄수사대는 투표지가 부족했던 구 선관위 직원들에게 출석을 요구하고 일정을 조율 중이다. 경찰은 이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본 투표일 중앙선관위, 서울시선관위와 소통 내역, 투표용지 준비 상황 등을 확인할 방침이다.
앞서 4일 이 사건을 배당받은 광수대는 닷새 만에 고발인과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하지 못한 시민, 선거 사무에 동원된 구청 공무원 조사를 마치고 투표소 내부 폐쇄회로(CC)TV도 일부 확보한 상태다.
◆법원, 잠실7동 투표소 현장검증 = 서울동부지법 민사제51단독(부장판사 김지연)은 9일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정철 개혁신당 최고위원의 투표용지 보관 상자 등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을 일부 인용했다.
보전 대상은 우선 송파 잠실7동 제2투표소에 보관된 ‘인쇄매수 1900매’ 투표용지 보관상자와 그 포장재다.
이곳을 포함해 투표지 부족 사태가 벌어진 송파구 10개 투표소에서 6월 3일 오전 8시부터 6월 5일 오후 9시까지 찍힌 투표소 및 투표함 보관 장면 촬영 폐쇄회로(CC)TV 영상도 포함됐다.
법원은 투표지 부족 사태 당시 선관위 직원 간의 단체대화방, 메신저, 문자메시지 기록 역시 보전할 것을 지시했다.
다만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송파구 투표소에서 사용된 본투표지, 이후 잠실 지역 개표소인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으로 옮겨진 투표함 등에 대한 신청 등은 기각됐다.
증거로 보전되는 투표용지 보관상자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 관리 실태를 보여주는 물품 중 하나로 꼽힌다.
박스 겉면에 적힌 ‘투표용지 인쇄 매수’는 총 1900매였다. ‘박스 1개 중 1번’이라고 적혀있다. 이 투표소의 선거인 수는 3856명으로 파악됐다. 투표지가 선거인의 49.3% 분량만 준비된 것으로 ‘투표용지 최소 50% 인쇄’ 지침에 못 미쳤다.
결국 이 투표소에서는 본투표 종료 전 준비된 투표용지가 모두 소진되면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일이 발생했다. CCTV 영상에는 이러한 혼란상이 그대로 담겨있을 것으로 보인다.
선관위 직원들의 단체 대화방 내용에선 투표지 부족 사태가 언제부터 발생했으며, 어떤 대응 조치가 이뤄졌는지가 드러날 전망이다.
다만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벌어지는 핸드볼경기장에 보관 중인 투표지·투표함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은 기각됐다. 선관위 관리 아래 보관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증거 보전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CCTV나 투표소 내부에서 발견된 투표용지 박스는 삭제나 탈취 등을 통해 증거가 훼손될 가능성이 일부 있는 만큼 법원이 보전을 결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결정을 내린 김지연 부장판사는 10일 오후 3시 잠실7동 제2투표소를 찾아 현장 검증을 한다. 이 투표소는 투표시간 연장과 2박 3일간의 점거 사태가 벌어진 곳이다.
이번 증거 보전은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김정철 최고위원이 선거 무효 소송을 내기 전 증거를 먼저 확보해달라며 지난 8일 법원에 제기한 신청에 대해 법원이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의 효력을 다투는 선거소청은 투표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제기돼야 한다.
◆중앙선관위, 자체 진상규명위 구성 = 중앙선관위도 외부 전문가 위주로 ‘투표용지 부족 사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 9일 경기 과천청사에서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진상규명위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 파악을 위해 출범한 독립기구로, 오는 19일까지 10일간 운영된다.
위원회는 조현욱 위원장(전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을 포함해 시민단체와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에서 추천받은 외부 인사 6명으로 구성됐다.
앞서 진상규명위는 투표용지 인쇄·배정 등 수급 관리 전반을 조사하고, 상황 발생 후 투표소 운영과 초동 조치, 보고 체계의 적정성 등을 들여다볼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선관위는 본투표일인 3일, 투표현장의 투표용지 부족 관련 문의를 받고도 수 시간 이상 조치를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선관위가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송파구선관위는 선거 당일인 3일 오전 11시 40분쯤 처음으로 서울시선관위에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에 대비해 시위원회 보관 투표용지의 일련번호 부여 여부를 문의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민원인 항의전화를 받은 오후 4시 25분에야 사태를 최초 인지한 것으로 알게 됐다. 서울시선관위가 송파구에 회신을 준 것도 최초 문의 후 5시간 넘게 지난 오후 5시 10분쯤에서였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