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시장은 그린스펀 원하지만, 워시는 볼커를 마주하고 있다
지난 22일, 미 연준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케빈 워시 신임 미 연준 의장이 공식 취임 후 첫 FOMC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직후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린스펀 전 의장의 영원한 퇴장과 새로운 미 연준 수장인 워시 의장의 등장이 겹친 극적인 우연 앞에 월스트리트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트럼프행정부 및 자산 시장은 곧바로 케빈 워시를 향해 그린스펀 시대와 같은 또 한 번의 경제부흥을 주문했다.
그린스펀은 1987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 1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미 연준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비롯해 2000년대 초 닷컴 버블 붕괴, 2001년 9.11 테러 등 굵직한 세계 경제의 충격이 연이어 발생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이러한 거시경제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위기를 방어하며 1990년대 미국의 전례 없는 장기호황을 만들어냈다.
그를 ‘마에스트로’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실업률이 하락하면 물가상승 압력이 커지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선제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중앙은행의 정석적인 접근을 깨뜨린 혜안이다.
그린스펀은 1990년대 낮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성 향상’의 파급력을 일찍이 간파했다. 생산성 향상이 물가상승을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해 금리인상 대신 완화적인 기조를 유지했고, 그 결과 고성장 속에서도 낮은 실업률과 안정적인 물가가 공존하는 1990년대 미국의 ‘골디락스’ 경제를 실현해 냈다. 이는 당시 경제학 교과서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던 현상이었고 그린스펀은 그 시대의 영웅이 됐다.
그린스펀과 워시가 마주한 환경 달라
30년이 흐른 2026년 현재 미국 자산시장은 ‘생산성 혁명’을 기대하게 만드는 AI산업을 통해 199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워시 의장의 금융정책 철학에는 미 행정부와 시장이 함께 환호할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워시는 자신의 롤모델인 그린스펀처럼 철저히 시장 자율을 중시해 벤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이 시작한 기준금리 사전 예고제를 전격 폐지하며 시장의 과외선생 역할을 끝내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무엇보다 그린스펀과 마찬가지로 “AI 혁명과 생산성 향상이 장기적으로 공급을 증가시키고 물가를 하락시킬 것”이라는 기술 낙관론을 정책의 주요 기조로 삼는다는 점에서 연준이 조만간 ‘그린스펀 풋’에 맞먹는 ‘워시 풋’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시장 일각에서는 존재했었다.
그러나 막상 워시 의장이 주재한 첫 FOMC 회의의 뚜껑이 열리자 시장의 장밋빛 기대는 착각에 가까웠음이 드러났다. 당초 올해 기준금리 동결을 예상했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와 도이체방크는 회의 직후 전망을 수정하며 워시 의장 체제에서 올해 최소 두 차례 이상의 기준금리 인상이 단행될 수 있다고 내다봤을 정도다.
워시 의장이 마주한 2026년의 미국 경제는 그린스펀이 구가했던 1990년대의 환경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린스펀이 물가상승의 공포 없이 금리인하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 있었던 진짜 배경은 기술혁신 이전에 실물경제 상으로 ‘저물가’가 가능한 시대적 축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분업이 고도화되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저임금 공장이 세계 무역에 편입되면서 1990년대는 막대한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 압력이 시장을 지배했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자신의 저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1990년대가 흘러가면서 세계화는 성공 국면에 접어들었고, 공산주의를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 미국이 세계화의 수호자 역할을 맡으면서 미국 경제 부흥이 가능해졌다”며 미국 경제 성공비결을 밝힌 바 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때 경제적 우군이었던 중국과의 패권 전쟁, 이로 인한 보호무역주의의 부활과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 등 ‘탈세계화’ 추세가 미국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 연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펜데믹 이후 줄곧 인플레이션은 미 연준 목표치인 연 2%를 웃돌고 있다. 최근에는 미 행정부의 관세장벽과 이란과의 분쟁 장기화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지난 12월 간 헤드라인 개인소비지출(PCE) 물가는 3.8% 상승했고, 지난 6개월간의 상승 속도는 연율 기준 5%에 육박하는 등 나날이 인플레이션의 위기가 고착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플레이션 위기와 ‘재정 건전성’의 붕괴
여기에 더해, 국가 ‘재정 건전성’의 붕괴 역시 미 연준의 선택지를 줄이는 요인이다.
1990년대 후반 클린턴 행정부는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연방 예산 흑자가 발생했다. 국가 채무의 GDP 대비 비율은 1993년 47.8%에서 2000년 33.6%로 감소했다. 국가의 곳간이 넉넉했기에 연준의 다소 모험적이고 완화적인 통화정책도 달러의 패권과 신뢰를 흔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은 글로벌 팬데믹이나 심각한 경제위기가 없는 평시 상황임에도 전례 없는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쏟아내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채 규모와 이를 막기 위한 막대한 이자 비용은 이미 국방 예산을 훌쩍 뛰어넘었다.
AI가 가져올 생산성 혁명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과거 그린스펀의 선례와 미 행정부의 요구에 따라 무작정 기준금리를 내린다면 기축통화국으로서 미 국채가 가진 신뢰도는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게 될 위험에 노출된 상태인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과거 그린스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닷컴버블 사태를 타산지석 삼아 시장이 맹신하고 있는 ‘AI 생산성 혁명’의 실체에 대해서도 냉정히 짚어볼 필요도 있다. 1990년대 후반의 인터넷 보급이 그러했듯 새로운 기술이 실제 거시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과 기업의 실질적인 이익 창출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한다. 당장의 실체적 이익 증명 없이 미래의 장밋빛 전망만으로 주가가 폭등하는 현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1996년 주식시장의 ‘비이성적 과열’을 경고하고도 정작 저금리기조를 유지해 2001년 닷컴버블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던 그린스펀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유 시장이 스스로를 통제할 것이라는 내 경제 모델에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막연한 기술낙관론에 기대어 중앙은행이 섣불리 통화완화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치르는지 역사는 이미 증명하고 있다.
‘그린스펀의 향수’에서 깨어날 필요
결국 워시 의장이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1990년대 그린스펀이 누리던 물질적 풍요의 시대’보다는 오히려 ‘1970년대 말 오일쇼크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늪에서 긴축을 감내해야 했던 폴 볼커 시대’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자산시장과 트럼프행정부는 하루빨리 ‘그린스펀의 향수’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다. 기술의 진보가 모든 거시경제적 난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AI 만능주의는 과거 닷컴버블이 남겼던 뼈아픈 상처처럼 실체 없는 거품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신임 연준 의장에게 부여된 최우선 시대적 과제는 이러한 버블에 유동성을 공급해 단기적인 축제를 연장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기축통화 달러의 신뢰를 방어하고, 어느새 미국 경제의 구조적 질병으로 고착화된 인플레이션과 지루한 참호전을 치러내는 것이다.
11월 중간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과 AI붐에 강하게 올라타고픈 월스트리트는 연일 자산시장에 환호성을 안겨줄 ‘제2의 그린스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그린스펀의 삶을 통해 ‘시장이 원하는 것’과 ‘경제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이 순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