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전쟁 중재로 존재감 키운 파키스탄
“강대국 외교 공백 메웠다”
미국과 관계 회복도 지렛대
파키스탄이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을 중재하며 국제 외교무대에서 새로운 영향력을 확보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통적인 군사·경제 강대국이 아니라 서로 적대하는 국가들과 동시에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재 국가’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는 20일(현지시간) 아스판디야르 미르(Asfandyar Mir) 스팀슨센터 남아시아 담당 선임연구원의 기고문을 통해 파키스탄의 최근 외교 행보가 다극화하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미르 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4월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싸고 최고조에 달했을 당시 아심 무니르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란 지도부를 상대로 휴전을 적극 촉구했다. 이후 미국과 이란이 휴전을 발표했고 양측은 파키스탄의 중재 역할에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미르 연구원은 이를 두고 “중국과 프랑스, 독일, 인도, 영국 등 전통적인 강대국들이 하지 못한 일을 파키스탄이 해냈다”고 평가했다. 경제력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제기구에서의 영향력 등 기존의 강대국 기준으로 보면 파키스탄의 위상은 제한적이지만 적대 진영을 연결할 수 있는 외교적 유연성이 새로운 전략 자산이 됐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강점으로는 미국·중국과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긴밀히 협력하고 이란과도 외교 채널을 열어둔 독특한 위치가 꼽혔다. 특히 미국과 이란 어느 한쪽의 동맹이나 적국으로 규정되지 않은 점이 중재자로서 신뢰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무니르 참모총장이 최근 수년간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공을 들인 것도 파키스탄의 영향력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미르 연구원은 지난해 5월 인도와의 군사 충돌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무니르 참모총장의 관계가 가까워졌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안보 협력 강화와 이란과의 외교 채널 확대가 파키스탄의 중재 역량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역할은 파키스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카타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및 인질 협상을 중재했고, 튀르키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흑해 곡물협정을 이끌었다. 이집트는 가자지구와 연결되는 라파 국경을 지렛대로 협상에 관여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도 홍해에서 후티 반군의 공격을 완화하기 위한 외교에 나섰다.
미르 연구원은 이런 국가들이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 진영에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적대 세력 사이에 소통 채널을 제공하는 ‘질서 안정화 외교’의 핵심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도 기존 동맹 중심의 외교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나 아시아의 조약 동맹국에 주로 의존하는 방식만으로는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이란 등 복합적인 분쟁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