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기름값·밥상물가 덮친다
디젤 급등에 곡물값 3년 만에 최고 … 중동·우크라이나 전쟁과 폭염 겹쳐
파이낸셜타임스(FT) 23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유시설은 중동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부족해진 석유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사실상 최대 가동 상태에 들어갔다. 미국 정유시설 평균 가동률은 96%이며 중서부와 로키산맥 지역은 100%에 달했다. 미국 에너지기업들은 디젤과 항공유 수출을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렸다.
호르무즈해협은 미국과 이란의 휴전 이후 잠시 통행이 늘었지만 양측 충돌이 다시 격화되면서 사실상 얼어붙었다. 예멘 후티 반군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수출에 이용하는 홍해 항로도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정제능력이 줄었고 러시아 정부는 이달 디젤 수출을 금지했다.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 도매 디젤 선물 가격은 이달 들어 26% 급등했다. 원유를 휘발유와 디젤로 가공할 때 정유사가 얻는 배럴당 이익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그러나 가동률이 이미 한계에 가까워 정유시설 한 곳이라도 고장 나거나 허리케인 피해를 입으면 공급 차질이 더 커질 수 있다.
조 드로라 네덜란드 협동조합은행 라보뱅크 수석 에너지전략가는 “미국의 수출 증가는 도움이 되지만 큰 총상에 붙인 임시 붕대에 불과하다”며 “정유시설을 전부 가동해 부족분을 메우고 있어 다른 시설이 추가로 멈추면 상황이 매우 나빠진다”고 말했다.
비축 여력도 빠르게 줄고 있다. 미국 정부는 호르무즈해협 봉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3월 사용을 약속한 전략비축유 1억7200만배럴 가운데 약 77%를 방출했다. 전략비축유는 3억1100만배럴로 1983년 이후 최저 수준까지 내려왔다. 주요 상업 원유 저장시설인 오클라호마주 쿠싱 재고도 6월 말 이후 약 2000만배럴에 머물러 가동상 최저 수준에 근접했다.
식량시장도 흔들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같은 날 주요 농산물 10종을 추적하는 블룸버그 농업현물지수가 2023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지수는 7주 연속 상승했다. 흑해 공격이 곡물 교역을 막고 유럽과 미국의 폭염이 수확량을 위협한 결과다.
시카고 밀 선물 가격은 하루 전 4% 넘게 오른 뒤 2년 만에 최고치를 새로 썼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항만과 선박을 공격하면서 세계 밀 수출의 25% 이상을 담당하는 흑해 지역의 교역이 줄고 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항에서는 곡물회사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의 보리 운반선이 피격됐고 러시아는 방공망이 부족한 아조우해와 캅카스항 일부 지역의 선박 정박을 금지했다.
중동 전쟁에 따른 원유 상승은 옥수수와 식물성 기름 같은 바이오연료 원료 수요도 밀어 올렸다. 시카고 대두 선물은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팜유 선물은 한때 2.1% 상승했다. 유럽에서는 폭염으로 옥수수 작황 우려가 커졌으며 세계적인 이상기후인 엘니뇨가 돌아오면서 커피와 코코아 가격도 오르고 있다.
데니스 보즈네센스키 호주연방은행 농업담당 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 공급이 도착하느냐는 문제”라며 “폭염과 중동의 긴장이 수주간 쌓인 가운데 흑해 충돌이 마지막 결정타가 됐다”고 말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