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엔 농축 가능성 열고 한국엔 제한
미 핵협정 ‘이중잣대’ 논란 한미 원자력협상 영향 주목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체결한 원자력협정이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 가능성을 남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에 대한 ‘이중잣대’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3일(현지시간) 미·사우디 원자력협정을 분석한 기사에서 “사우디가 자국 영토에서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는 길로 이어질 수 있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워싱턴은 서울로부터 ‘왜 사우디는 되고 우리는 안 되는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촉발했다”고 보도했다.
NYT는 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엄격한 국제 안전조치를 받아들이면서 원자로 26기를 운영해 온 원전 강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과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놓고 협의해왔지만 미국은 핵확산 우려를 들어 제한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반면 사우디는 아직 상업용 원전을 가동한 경험이 없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사우디도 핵무기를 보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은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해왔다.
미국과 사우디는 22일 미국 원자력법 123조에 따른 평화적 원자력협력 협정과 양자 안전보장조치 협정에 서명했다. 미 에너지부는 이번 협정이 미국 기업의 사우디 원자력 사업 참여를 확대하고 양국의 에너지와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 협정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NYT는 익명의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양국이 핵연료 생산의 경제성을 2년간 공동 연구한 뒤 사우디가 자국 영토에서 우라늄을 농축하거나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수 있도록 허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CNN도 사우디가 아랍에미리트(UAE)와 달리 농축·재처리 권한을 포기하거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의정서에 가입할 의무를 지지 않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UAE는 2009년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면서 자체 농축과 재처리를 포기하는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를 수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사우디와의 원자력협정을 승인하겠다면서도 “사우디가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밝혔다. 아브라함 협정은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중재로 UAE와 바레인, 모로코, 수단이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협정이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사우디가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지 않으면 원자력협정은 무산된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이번 협정이 민간 원자력 이용에만 해당한다며 “핵물질 농축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NYT와 CNN은 사우디의 농축 가능성을 남겨둔 당국자들의 설명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반대하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조건이 실제로 충족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미·사우디 협정은 한미 원자력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정부는 원전 연료의 안정적 확보와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해 평화적·상업적 목적의 농축과 재처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한국은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설명자료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미 원자력협정과 미국 법률의 범위 안에서 민간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이어질 절차를 지지한다는 정치적 합의를 끌어냈다.
NYT는 미·사우디 협정이 한미 원자력협상 진전에 대한 기대를 높일 수 있다면서도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계속 외면하면 70년 넘게 이어진 한미동맹에 균열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