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 ‘근육 늘리는 비만약’ 임상 진입…체중감량 경쟁서 ‘감량의 질’로 승부
자체 AI 플랫폼으로 HM17321 설계·최적화
지방 줄이고 근육 늘리는 CRF2 선택적 작용
미국 임상 1상 진행…유효성·안전성 입증 남아
비만치료제 시장의 경쟁축이 ‘얼마나 많이 체중을 줄이느냐’에서 ‘지방을 선택적으로 줄이면서 근육과 신체기능을 얼마나 지키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한미약품이 자체 인공지능 플랫폼을 활용해 개발한 HM17321은 이러한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후보물질이다. 기존 인크레틴 계열과 다른 기전으로 지방 감소와 근육 증가를 동시에 겨냥한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주목된다.
한미약품은 12∼1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 분자생물학 지능형 시스템 학술대회(ISMB 2026)에서 자체 AI 플랫폼 ‘HARP-pSAR’를 활용해 근육 강화 기반 비만 신약 파이프라인을 도출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번 발표의 가치는 단순히 신약개발 과정에 AI를 적용했다는 데 있지 않다. AI가 제안한 단백질 서열을 실제 실험으로 검증하고 후보물질을 최적화해 미국 임상시험 단계까지 연결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AI 신약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모델의 예측 정확도 자체보다 실제 후보물질 발굴과 임상 진입 기간을 얼마나 줄이느냐이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에 따르면 HARP-pSAR는 단백질 서열의 미세한 변화가 약리 활성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하는 플랫폼이다. 특히 신약개발 초기 단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소량 데이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규모 학습데이터와 고성능 컴퓨팅 인프라를 전제로 하는 일반적인 AI 모델과 달리 수십건의 내부 실험 결과만으로 표적·비표적 수용체 활성을 예측하도록 설계됐다.
양자화 기술을 적용해 연산 비용을 낮추고 일반적인 로컬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점도 실용적 가치로 꼽힌다. 연구자가 단백질 후보를 일일이 설계·합성한 뒤 활성을 확인하던 과정을 줄이고, AI가 우선순위가 높은 서열과 아미노산 변이 위치를 제안하도록 한 것이다.
◆체중보다 체성분 개선에 초점 = HARP-pSAR를 통해 최적화된 HM17321은 장기지속형 UCN2 유사체다. GLP-1이나 GIP 등 인크레틴 수용체가 아닌 CRF2 수용체를 선택적으로 자극한다. 지방 감소와 골격근 증가, 근기능 개선을 직접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발 과정의 핵심은 CRF2 수용체에는 강하게 결합하면서 스트레스 반응 등과 관련된 비표적 CRF1 수용체에는 활성을 나타내지 않도록 서열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한미약품은 AI 예측과 구조 모델링, 실제 약리실험을 반복해 수용체 선택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HM17321의 가장 큰 차별점은 단순한 ‘근손실 방지’가 아니라 ‘지방 선택적 감량과 근육량 증가’를 동시에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현재 비만치료제 시장을 주도하는 GLP-1 계열은 강력한 체중감량 효과를 보이지만 감량 과정에서 지방뿐 아니라 제지방도 함께 감소할 수 있다. 고령자나 근감소증 위험이 있는 환자에게는 근력과 신체기능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비만치료제 개발 경쟁에서도 체중감량률과 함께 체지방·제지방 구성, 근력, 보행능력 등 ‘감량의 질’이 새로운 평가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미약품이 공개한 비임상 연구에서 HM17321은 식이유도 비만 동물의 체지방을 줄이면서 제지방과 근섬유 크기를 증가시켰다. 근지구력과 혈당·지질 등 대사지표 개선 가능성도 확인됐다. 세마글루타이드나 한미약품의 차세대 인크레틴 후보물질과 병용했을 때 추가적인 지방 감소와 제지방 보존·증가 효과도 관찰됐다.
한미약품은 이를 토대로 HM17321을 단독치료제뿐 아니라 GLP-1 계열 약물의 보완재로 개발하고 있다. 회사가 공개한 파이프라인 자료도 HM17321의 단독요법과 인크레틴 병용요법을 함께 제시한다. 현재 미국에서 건강한 성인과 비만인을 대상으로 단회·반복 투여의 안전성, 내약성, 약동학·약력학을 평가하는 임상 1상이 진행 중이다. 임상시험 등록정보에 따르면 약 90명을 대상으로 하며 비만 참가자에게는 주 1회, 12주 동안 투여하도록 설계됐다.
◆독립 기전과 병용 확장성이 경쟁력 = HM17321의 시장 경쟁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인크레틴 계열과 겹치지 않는 작용기전이다. 식욕 억제 중심의 GLP-1 계열과 달리 CRF2 신호를 통해 지방과 근육에 작용하기 때문에 단독 투여뿐 아니라 기존 비만약과의 병용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미 강력한 GLP-1·GIP 계열 제품이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이들과 직접 체중감량률을 겨루기보다 약점을 보완하는 병용 파트너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둘째는 근육 보존을 넘어 증가를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쟁 후보 대부분은 마이오스타틴이나 액티빈 신호를 차단해 GLP-1 치료에 따른 제지방 감소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발되고 있다. 리제네론의 트레보그루맙은 세마글루타이드와 병용한 임상 2상에서 세마글루타이드로 발생한 제지방 감소의 약 절반을 막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리제네론 COURAGE 임상 2상 결과
이에 비해 한미약품은 HM17321 단독으로 체지방을 줄이고 근육량과 기능을 높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이 효과가 재현된다면 ‘근손실 완화제’를 넘어 독립적인 체성분 개선 치료제로 차별화할 수 있다.
셋째는 펩타이드 의약품이라는 점이다. 근육 강화형 경쟁 후보 상당수는 항체 기반이다. HM17321이 주 1회 투여 가능한 펩타이드로 개발될 경우 제조비용과 투여 편의성, 인크레틴 제품과의 복합제 개발 측면에서 유리할 가능성이 있다. 한미약품이 보유한 장기지속형 펩타이드 설계·생산 경험도 개발 위험을 낮추는 자산이다.
여기에 펩타이드 기반 마이오스타틴 억제 후보 HM500197까지 확보하면서 한미약품은 CRF2 활성화와 마이오스타틴 억제라는 두 개의 근육 강화 축을 갖추게 됐다. 향후 비만뿐 아니라 근감소증, 노쇠, 대사질환 등으로 적응증을 확장할 여지도 있다.
◆사람에게서 ‘근육의 양과 기능’ 입증해야 = 다만 현 단계에서 HM17321의 경쟁력을 확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이르다. 체지방 감소와 근육 증가 효과의 대부분은 동물실험에서 나온 결과다. 비만 동물에서 관찰된 체성분 변화가 사람에게 같은 크기로 나타날지는 임상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CRF2 수용체가 심혈관계와 스트레스 회복 신호 등에 관여하는 만큼 용량에 따른 심박수·혈압 변화와 장기 안전성을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표적 선택성을 높였다는 AI·실험 결과가 실제 사람에서도 비표적 작용을 충분히 억제하는지가 중요하다.
근육량 증가가 실제 근력과 이동능력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도 핵심 평가 대상이다. 제지방량이 늘더라도 근력, 보행속도, 계단 오르기와 같은 신체기능이 개선되지 않으면 임상적 가치는 제한될 수 있다. 임상 2상부터는 체중감량률과 체지방량뿐 아니라 근육량, 근력, 신체기능 및 치료 중단 뒤 체중 재증가 여부를 함께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경쟁 속도도 만만치 않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미 항마이오스타틴·항액티빈 계열 후보를 GLP-1 치료제와 병용하는 사람 대상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다. 일부 후보는 제지방 보존에 관한 인체 데이터를 확보했다. 임상 1상 단계인 HM17321은 기전의 독창성에서는 앞설 수 있지만 개발 단계에서는 후발주자다.
이번 ISMB 발표가 보여준 것은 완성된 비만치료제의 경쟁력이라기보다 한미약품이 후보물질 발굴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술과 차별화된 임상 가설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HARP-pSAR가 하나의 후보물질에만 적용된 모델을 넘어 다른 펩타이드와 단백질 신약 설계에도 반복적으로 성과를 내면 한미약품의 AI 플랫폼은 개별 파이프라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HM17321이 사람에게서 지방 감소와 근육 증가를 동시에 입증한다면 비만치료제 시장의 경쟁 기준은 단순 체중감량률에서 건강한 체성분과 기능을 회복하는 ‘고품질 감량’으로 한 단계 이동할 수 있다. 앞으로한미약품의 성공은 현재 진행 중인 미국 임상에서 그 가능성을 얼마나 정량적으로 증명하느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