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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이 사고예방을 도우려면

2024-01-19 10:55:23 게재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

'사업의 규모와 특성에 접합한 사고예방 체계' 이것이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의 핵심 주문이다.

2021년 산재사망 발생율은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제정된 1981년과 비교해 1/5 이하로 줄었다. 효율성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그 동안 산안법은 사고예방과 재해 감소에 기여해왔고 기본적인 안전규칙의 규범화 역할은 아직 남아있다. 산안법은 공통적이고 구체적인 조치 기준으로 기업마다 각기 다른 생산 조건과 환경을 고려할 수 있는 유연성이 별로 없는 법규다.

이와 달리 중대재해법 제4조에는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성 및 규모 등을 고려하여'라는 전제 조건으로 '체계의 구축과 이행' 의무를 부과했다. 입법 관여자들의 논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정체돼 있는 중대재해 발생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업의 체계적 접근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 중대재해법은 산안법규의 속성과 다른 월등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중대재해법 제4조 전제 조건의 의미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체계가 기업별로 다름과 고유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시행령은 아직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강 밀림 산악 사막의 생태체계는 각기 다르다. 그 구성 요소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이 같을 수 없다. 같은 항공분야의 제품일지라도 레저용 드론과 스텔스 전투기의 제조과정,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위험과 그 제어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름은 체계의 고유성이고 체계와 그 고유성은 닭과 달걀처럼 분리 불가의 관계다. 생산 여건과 환경이 반영되지 않은 업무체계는 체면만 차린 모양으로 형식화돼 효용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산안법규의 정량적 정형적 경직성

산안법은 모든 제조업 사업장 정규직 근로자에게 채용시 8시간, 매월 2시간 이상의 안전보건교육을 하도록 정했다. 업체별로 다른 생산의 복잡성, 위험도와 관계없이 같은 시간의 교육을 받도록 돼있다.

같은 사업장 내에도 경비, 청소, 조리, 보일러, 전기, 기계 운전, 자재와 제품 운반, 다양한 작업이 있다. 담당 업무의 난이도, 위험성 등이 각기 다른 근로자들 모두가 업무 특성, 자신의 숙련도와 관계없이 같은 시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산안법규의 정량적 경직성이다. 요즘은 TBM(Tool Box Meeting) 과 같은 단시간 교육도 인정하는 등 부분적인 보완은 있으나 개인별 시간 조정은 허용되지 않는다.

교육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제조업 사업장 정규직 근로자에게 교육해야 하는 내용은 산업안전과 사고예방에 관한 사항 등 안전·사고·보건·건강 영역의 8가지다. 안전은 원활하고 무탈한 작업의 결과다. 정작 사고예방을 위해 작업자에게 필요한 것은 작업과 관계된 기계 설비 도구 등을 포함한 자신이 해야 하는 작업에 관한 지식 및 정보 습득과 숙련을 위한 훈련이다. 그러나 이는 법규에 정한 안전교육 외의 사항이다.

예를 든 교육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량, 정형적 기준을 효용성과 무관하게 준수해야 한다. 효용성이 높더라도 기준과 다른 활동이나 인증을 받지 않은 안전장치 안전시설 보호구 등과 같은 기술기준은 더 경직적이다. 알을 낳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니 곰도 알을 낳으라는 식이다.

산안법의 정량적, 정형적 경직성은 사고예방을 체계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기업에게는 불필요한 낭비를 조장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생산 규모와 특성을 반영하기 위한 유연성은 규제기관의 재량권 외에는 거의 없다.

중대재해법 시행령, 산안법 보조법 인식

이런 상황에 기업의 효용과 효율적 접근의 물꼬를 터줄 수 있는 중대재해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그 시행령의 맥락적 구성이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중대재해법을 산안법의 준수를 더 강하게 요구하는 보조법 정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중대재해법과 산안법을 상상적 경합으로 본 중대재해 사건 판결들로 짐작하면 재판부 역시 두 법이 같은 의무를 부여한 법률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 특정 부분의 구체화 또는 처벌을 달리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특정 법의 준수를 돕기 위해 별도의 법을 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고예방이라는 목적은 같으나 두 법의 의무는 식품의 위생기준과 설비기준의 차이와 같은 다른 내용이다.

중대재해법은 산안법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한단계 높은 기업 고유의 안전확보 체계 구축을 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한 시행령은 생산특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산안법의 정량적, 정형적 경직성을 해소할 법적 근거와 방식부터 제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