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도시 공정률 99%라는데 …
"감기약 하나도 차 타고 15분 나가야 살 수 있어"
5월말 현재 50개 기관 이전 … 내년까지 151개 기관 이전 마무리
직원 15% 가량만이 이주 … 병원·약국·마트 등 편의시설 태부족
"일요일 오후다. 가족과의 '짧은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가족 모두 내색은 안 하지만 표정이 어둡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버스에 몸을 싣고,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3시간 반 가량을 달려 진주에 도착했다. 이미 한밤중이다. 오피스텔 문을 열자 휑한 공간만이 나를 반긴다. 짐을 풀고, TV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질 않는다. 버스에서 잠을 잔 때문인듯하다. 냉장고를 여니 마시다 남긴 소주병이 있다. 집에서 가져 온 즉석밥과 반찬도 보인다. "아침 굶지 말라"며 아내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전 초기엔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그러나 심한 경우, 하루 세끼를 먹게 되는 구내식당 음식에 금방 실증났다. 그래서 아침엔 직접 냉동밥과 반찬을 데워 먹는다. 벌써 가족 얼굴이 어른거린다. 소주 몇 잔을 들이킨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올해초 경남혁신도시(진주)로 이전한 남동발전 직원 ㄱ씨 얘기다.
◆혁신도시 부지조성 99.6% = 2003년 6월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이전 추진방침'이 발표된 지 11년이 지났다. 당시 국가균형발전특별법상 중앙행정기관을 포함한 공공기관은 총 409개였다. 이중 수도권 소재 345개 기관을 대상으로 심의를 거쳐 175개 기관의 지방이전을 결정했다. 이후 몇몇 기관이 추가되고, 공기업 선진화 등으로 일부 공기업이 통폐합되면서 이전대상 공공기관은 151개로 최종 확정됐다.
이들 기관은 수도권과, 대전청사 및 대덕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을 제외한 전국으로 분산됐다. 개별 이전기관 19곳, 세종시 이전기관 17곳을 제외한 나머지 이전기관들을 전국 10개 혁신도시로 분산배치했다. 정부는 지방이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공공기관을 가능한 유사한 기능군으로 묶었다. 부산엔 해양수산, 금융산업, 영화진흥 관련 기관을, 대구엔 산업진흥, 교육·학술진흥, 가스산업 관련 기관을 이전하는 식이다.
현재 혁신도시 부지조성 및 기반시설 설치는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혁신도시 부지조성 공정률은 99.6%다. 일부 구간이 설계변경 등으로 올 상반기에 마무리되고, 강원(99.6%)은 군 훈련장 이전으로, 울산(99.8%)은 도시시설물 설치로 내년말 부지조성이 끝나면 완료된다.
기반시설의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진입도로와 상수도는 각각 99.7%, 99.8%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다음달이면 100% 완료된다. 전기·통신·가스 등도 평균 공정률이 96% 이상이다. 이 역시 상반기면 완공된다.
부지조성과 함께 공공기관 이전도 속도를 내고 있다. 총 151개 이전대상기관 중 2012년 13개, 2013년 26개 등 5월말 현재 50개 기관이 이전을 마쳤다.
올해는 한국토지주택공사(경남), 한국전력공사(광주전남) 등 72개 기관이 이전한다. 가장 최근엔 한국동서발전과 한국전기안전공사가 16일부터 각각 울산과 전북혁신도시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내년에 나머지 38개 기관이 이전하면 모두 마무리된다.
공공기관 이전이 완료되면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은 기존 85%에서 35%로 줄어든다. 그만큼 이전기관 종사자와 관련 인구이동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2004년 국토연구원은 약 180개 기관(통폐합 이전), 3만2000여명이 이전할 경우 지방에 약 13만3000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연간 약 9조30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 및 약 4조원의 부가가치유발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소방서 등 행정시설 전무 = 그러나 이전 공공기관 직원들의 생활을 불편하기 짝이 없다. 기본적인 인프라만 갖췄을 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편의시설은 태부족이다.
전북혁신도시(전주)를 보자.
지난해 말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 LX대한지적공사 직원 ㄴ씨는 "지난 연말 아파트가 입주하면서 중국집과 빵집이 생기는 등 그나마 사람사는 구색이 조금씩 갖춰지고 있지만 지난해 11월 처음 이전했을 때는 온전한 것이라고는 공사 건물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전북혁신도시가 온전한 도시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약국, 병원 등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감기약 하나를 사먹으려해도 차로 15분을 달려 구시가지로 나가야 한다. 점심시간 짬을 내 병원에 다녀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ㄴ씨는 "지난달 교통사고로 매일 물리치료를 받았어야 하지만 제대로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 "고 말했다.대중교통 시설도 태부족이다. 노선 배정은 돼 있지만 배차간격이 긴데다, 툭하면 결행하기 일쑤다. 직원과 주민들이 노선을 늘리고, 증차를 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지만 묵묵부답이다. 손님이 적어 돈이 안 되는 상황에서 버스회사가 노선이나 차량을 늘릴 이유가 없다. 택시도 다르지 않다. 시내에서 떨어진 혁신도시는 택시기사들의 기피지역이다. 웃돈을 요구하는 게 다반사고, 승차거부도 빈번하다. 혁신도시에서 전주 시내로 택시를 타고 나가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다. 들어오는 택시가 없으니 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대형마트, 재래시장, 백화점 등 편의시설이 없어 장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구시가지로 나가야 한다. 경찰서, 소방서, 동사무소 등 행정시설도 전무하다. 어쩌다 화재라도 나면 소방차가 오기까지 15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소방서는 빨라야 내년 말이나 들어선다고 한다. 직원들은 "소방서가 들어올 때까지는 불내면 큰 일"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한다고 한다.
자녀 교육여건도 열악하다. 부근에 지난 3월 초등학교가 개교했지만 전입생이 폭증해 곧 콩나물 교실이 될 수준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아직 개교조차 하지 않았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나머지 혁신도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북혁신도시(김천)로 이전한 교통안전공단 ㄷ씨는 "기관 여섯 곳 정도가 들어왔는데 혁신도시 안에는 식당이나 상가건물이 아예 없다"며 "김천시나 구미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가족은 남겨둔 채 혼자 내려와 생활하는 직원들이 대부분이다. 전체 이전공공기관 직원의 15~20% 정도만이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알콜 중독될까 걱정" = 공공기관 지방이전은 직원들의 생활을 180도 바꿔 놓았다.
퇴근후 직원들과의 외식자리가 많아졌다. 대부분 혼자 내려와 있는 직원들인지라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업무와 연관된 관계자들을 만날 일도 거의 없어 매일 같은 직원들과 함께 어울린다. 저녁식사와 함께 반주가 곁들여지고, 2차로 이어질 때도 종종 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된다. 이전 초기에는 가족으로부터 해방(?)돼 즐거웠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다. 남동발전 ㄱ씨는 "'이러다 술중독되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건강을 걱정하는 직원이 많아지면서 술자리는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대신 자기계발이나 운동을 하는 직원들이 늘고 있다. 배드민턴, 탁구 등 운동 동호회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ㄱ씨는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해 평일에 한두시간 땀 흘리는 경우도 있다"며 "서울에 있을 때는 운동할 여건이 안 됐는데 그나마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충북·강원혁신도시 등 수도권 근처로 이전한 기관들은 여전히 많은 직원들이 출퇴근을 하고 있다. 충북음성으로 이전한 가스안전공사의 경우 30~40%의 직원들이 출퇴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가스공사에서는 출퇴근용 셔틀 5대를 운영 중이다. 그러나 이도 만만치 않다. 하루 4시간 가까이를 출퇴근에 허비하고 있다. 가스공사 직원 ㄹ씨는 "지금은 내려오려 해도 입주할 아파트가 없어 내려올 수 없지만 허리도 아프고, 체력적으로도 어려워 점차 많은 직원들이 내려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 모습도 달라졌다. 수도권에 있을 때는 업무 관계로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지금은 뜸하다. 웬만한 일은 전화나 이메일 등으로 처리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전남혁신도시(나주)로 이전한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직원 ㅁ씨는 "금요일 서울에서 회의가 있는 경우에는 그나마 하루이틀 일찍 올라올 수 있는 게 기쁨"이라고 말했다. 이전기관 종사자 모두가 불편하겠지만 기혼 여직원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때문에 기혼 여성 중에서는 내려오기 전 회사를 그만둔 사례도 많다.
국토부 공공기관지방이전단 관계자는 "아직 정주여건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아 일부 불편한 것은 사실"이라며 "생활편의시설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