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교단일기 / 신동원(휘문고 진학교감, 서울중등진학지도연구회 회장)_어느 학부모와 그의 아들
사실 공부는 상당히 재미있는 작업이다. 교과서를 읽고 요약하고, 기억하고, 말로 설명하거나 문제를 풀어보는 일이 어렵고 힘든 일만은 아니다. 몰랐던 개념을 이해하고,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문제를 쉽게 풀 수 있게 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손맛의 쾌감이나 득템의 환희, 레벨 업의 감동이 공부에도 똑같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공부하고 경쟁하면서 잘 버텨내고 있다.
어느 학부모와의 전화통화
“중학교 때 언제나 학급에서 5등 안에 들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중간도 못했습니다. 고교 입학 후 대학입시에서 내신 성적이 중요하다고 해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새벽 일찍 학교에 가 자율학습실에서 자습하다가 조회시간에 교실로 가고, 쉬는 시간에도 놀지 않고 공부만 한다고 합니다.”
“담임선생님께서도 수업태도나 학습태도가 모범적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저녁에도 독서실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옵니다. 주말에도 늘 집이나 독서실에서 공부만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중간밖에 못 가니 우리 아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납니다.”
“교감선생님! 중학교 때 선행학습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아이가 혼자 문제집이나 자습서 문제를 풀면 잘 풀린다며 학원가는 걸 싫어해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에서 관리를 받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1학년 과정에 화학과 지구과학을 편성해 학습 분량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국·영·수에다 과학 두 과목까지, 시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게다가 처음 배우는 제2외국어도 있습니다. 시험 범위가 교과서 100쪽이 넘는 과목도 있고요. 공부할 분량이 우리 아이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참담합니다.”
“가르치지 않은 것을 시험에 출제해도 되나요?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언급도 안 했고, 문제집에도 없는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하던데…시험 범위 안에 있는 개념이라도 교과서 내용 밖에 있는 문제를 내면 선행학습 금지법에 위반되는 것 아닌가요?”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아들이 고등학교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과목 만점을 받아가며 전교권에 드는 아이들도 있으니 더욱 절망적입니다.”
고등학교에서는 다섯 달 남짓 되는 한 학기 동안 300여 쪽 분량의 교과서 8권을 배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고 수행평가를 더해 성적을 낸다. 100명 중 4명만 1등급이라 하고, 그 뒤 7명은 2등급 그 다음 12명은 3등급이라고 한다. 요즘 고등학교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각박하기 짝이 없고, 그 속에 갇혀 있는 자녀들이 안쓰럽다. 그래서 학부모는 화가 난다.
그 학부모 아들하고의 대화
“고등학교에 와서 좋은 친구 많이 만났습니다. 머리가 좋은 친구도 있고, 진짜 실력이 쎈 친구도 있고, 성악가처럼 노래 잘 부르는 친구도 있고, 영어소설을 사전도 없이 읽는 친구도 있어요. 여자 친구를 매일 만나는 친구도 있고,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음악만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모두 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미래는 걱정이 안 됩니다. 지금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조금씩 좋아질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사실 저는 머리가 좀 둔해서 뭐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려요. 선생님 질문에 다른 애들처럼 바로 대답을 못해요. 좀 생각하고 말하다 보니 늘 기회를 놓쳐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절 칭찬해주시는데 그때가 기분이 제일 좋습니다.”
“성적만 빼면 엄마하고 사이가 좋아요. 자꾸 학원에 가라고 하시는데 시간 낭비가 심한 것 같고 학원 선생님께 배우는 것보다 제가 정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선행을 많이 했는데 시험 성적은 선행과 별개더군요. 수업시간에 얼마나 집중했느냐와 시험 기간 중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가 더 중요하더라고요.”
“중학교 때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 고등학교 1학기 성적표를 받고 많이 놀랐습니다. 슬프기도 하고요. 담임선생님이 많이 실망하셨을 것 같아 죄송했고요. 그래도 담임선생님께서 방학 때 저만 불러 격려해 주셔서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제 성적 문제로 큰 걱정을 하십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가면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농사나 지으라고 하십니다.”
“내신 성적이 4등급대라 수시로 대학가기는 힘들 것 같아요. 경시대회에서 상 받는 것은 엄두도 못 내요. 수능 공부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모의고사에서 수학과 영어는 다행히 1등급입니다. 모의고사도 점점 어려워진다고 하니 EBS 인강 열심히 들어야죠.”
“독서는 못하고 있어요. 전자공학과 진학이 목표인데 꼭 독서를 해야 하나요? 독서를 하면 집중력이 생겨서 좋긴 한데 책 읽을 시간이 정말 없어요. 수능으로 대학가기로 마음먹었는데도 독서를 꼭 해야 하나요?”
“친구들로부터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소릴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번도 성실하게 하고, 숙제도 미리 해오고, 청소도 열심히 하니 친구들이 저보고 착하대요.”
“지금 행복하냐고요? 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먹고 자고 공부하는 걸 불행하다고 하면 죄가 될 것 같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께도 도리가 아닌 것 같고요.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좀 불안할 때도 있지만 제가 맘먹기 나름인 것 같아요”
학생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도 잘한다. 피부가 하얗고 여드름도 하나 없는 얼굴에 귀티가 흐른다. 긍정적이고 착한 학생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고교생활을 모범적으로 하고 있다. 학부모와 통화할 때 답답하기만 했던 마음이 그의 아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다 풀렸다. 학교 속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밖에서 기성세대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