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 DMZ 유전자원보호림을 가다
70년 동안 고스란히 보전된 생태계 낙원
백두대간과 한북정맥, 북한강 수입천이 걸쳐 있는 구간 … 31번국도에는 '금강산 가던 옛길' 흔적
지난 1일 산림청과 (사)녹색연합의 현장안내로 68년 만에 개방된 구 31번국도 '금강산 가는 길'을 돌아보았다. 양구군 동면 비아리 유전자원보호림 안내판에는 '통제기간 1.1~12.31'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사실상 1년 내내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다는 뜻이다. 31번국도를 따라 두타연 쪽으로 고갯길을 내려가니 수입천 상류가 나타났다. 여기서 수입천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열목어 서식지로 유명한 두타연이다.
31번국도는 수입천 상류 쪽으로 이어졌다. 철문으로 막힌 이 길에는 '금강산 가는 길'이란 안내가 붙어 있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입천 오른쪽으로 소형차량만 이동가능한 좁은 비포장도로가 나 있다. 도로 오른쪽은 가파른 절벽지대와 암석이 무너져내린 너덜지대였다.
도로를 벗어나면 미확인지뢰지대, 수입천 내부도 불발된 박격포탄 등이 산재해 있는 위험지역이다. 비포장도로 물웅덩이엔 두께 2cm 이상의 얼음이 얼었고 소나무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무들은 잎을 떨군 상태였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잎이 떨어진 나무와 숲을 오히려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물박달나무' '박달나무' '거제수나무' 등 남한지역에 자생하는 '자작나무과' 나무들이었다.
가리왕산처럼 큰 나무들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자작나무과 나무들을 한꺼번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중부 이북의 깊은 산지에서도 매우 드물다.
중간에 까만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는 흔치 않은 큰키나무를 발견했다. 산림청 관계자들과 함께 열매와 떨어진 잎, 수피 등을 보고 '황벽나무가 아닐까' 추정했는데 뒤따라온 국립수목원 DMZ자생식물원의 정수영 연구원이 "황벽나무가 맞다"고 확인해주었다.
◆ 여의도 면적의 240배에 이르는 보호구역 = 2018년 10월 현재 지정된 민북지역 산림유전자원보호림은 6만9189ha, 이는 여의도 면적의 240배에 이르는 면적이다. 2006년 녹색연합의 건의로 첫 지정된 이후 2012년, 2018년 봄 추가지정으로 민북지역의 주요 산림지대는 90% 가량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문헌조사 및 산림청 국립수목원 등의 조사 등을 종합하면, DMZ 일원 민북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의 관속식물은 2047종, 12아종, 340변종, 105품종 등 총 2504분류군으로 확인된다. 이는 국가표준식물목록(국립수목원, 한국식물분류학회, 2007) 기준 한반도 관속식물 4497종의 절반 이상인 55.6%를 차지한다.
DMZ 일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는 한반도의 북방계식물과 남방계식물이 공존한다. 향로봉에는 남한 최대의 '왜솜다리' 군락이, 가칠봉-서희령 사이의 GOP 철책선에는 남한 최대로 추정되는 '솔나리' 집단군락지가 펼쳐진다. 백석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내 GOP철책선 일대에는 역시 남한 최대로 추정되는 '금강초롱' 집단서식지가 있고 이 일대에는 희귀 북방계 식물인 '닻꽃'도 집단으로 서식한다.
DMZ 일대는 남한 최대의 멸종위기 야생동물 서식지이기도 하다. 사향노루 산양 수달 담비 삵 하늘다람쥐 등이 이 일대에 서식한다.
가곡 '비목'에는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이란 가사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궁노루는 '사향노루'의 별칭이다. 궁녀들이 일종의 페로몬 향수인 사향을 다투어 찾는 통에 '궁에서 찾는 노루'가 된 것이다.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서쪽 능선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는 실제 가곡 비목의 무대로 알려져 있고 최근까지 '사향노루'의 서식이 직접 확인된 곳이기도 하다.
2006년부터 DMZ 일원 생태조사를 지속해온 녹색연합 서재철 전문위원은 "이곳 야생동물들은 인간의 간섭을 적게 받아서인지 인간을 피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며 "심지어 사람을 극히 꺼리는 산양들도 종종 마주치지만 곧바로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지뢰지대'가 생태계 보전 순기능 할 수도 = 남북화해가 본격화되고 군사적 긴장이 사라진 뒤 이곳 DMZ 일원 보호구역은 어떤 모습이 될까? 서 위원은 "31번국도 금강산 옛길은 탐방로 정도로 유지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남북한 사이에 꼭 필요한 도로나 철도를 연결하더라도 DMZ 구간은 교량이나 터널 등 생태계 간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DMZ 일대는 곳곳이 지뢰지대로 중부전선에서는 요즘 한창 지뢰 제거작업이 진행중이다. 지뢰지대 표지판에는 사각형과 삼각형이 있다. 사각형은 '확인된 지뢰지대'란 표시이고 삼각형은 '확인되지 않은 지뢰지대'란 뜻이다.
얼핏 '확인된 지뢰지대가 더 위험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확인된 지뢰지대는 지뢰 매설지역이 어디인지 안다는 뜻이고 미확인 지뢰지대는 어디에 묻었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당연히 삼각표시가 있는 미확인 지뢰지대가 훨씬 위험할 수밖에 없다.
DMZ 일대에는 이런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다. 게다가 6.25전쟁 마지막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라 항공기로 살포한 '발목지뢰'가 다수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발목지뢰는 플라스틱 재질이라 잘 부식되지 않고 금속탐지기로도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훈련된 전문가들이 손으로 일일이 탐침을 해서 제거해야 한다.
취재에 동행한 백두산부대 관계자는 "DMZ 일원의 지뢰를 제거하려면 200년 정도 걸린다는 분석도 있다"며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동부전선의 경우 지뢰제거탱크 등 중장비를 동원한 제거작업이 불가능한 곳이 많다"고 말했다.
정말 현실이 이렇다면 잔혹한 전쟁의 잔유물인 '지뢰지대'가 사람들의 출입을 계속 통제해 역설적으로 한반도 생태계 보전이라는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