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학 살리기 … 100조원 펀드 조성
매년 운용수익 3조원으로 우수대학 뭉칫돈 지원 … 경쟁력 추락에 위기감 고조
자체수익 전제로 지원 논란
"연구풍토가 문제" 비판도
정부가 세금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운용수익으로 가능성 있는 대학을 집중 지원하겠다는 시도는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다만 기금운용의 안정성 우려와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대학의 수익력, 지방대학과 격차, 연구풍토의 근본적 개선없이 일본 대학이 살아날수 있을지 의문도 있다.
특정연구대학에 수천억원 지원
일본과학기술진흥기구(JST)는 최근 자산운용과 관련한 민간 금융회사를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코로나19 대책을 내놓으면서 10조엔(104조원) 규모의 대학발전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JST를 기금운용의 책임기관으로 선정한 후 첫발을 내디뎠다.
일본정부는 2020년과 올해 추경에서 각각 5000억엔, 6000억엔을 포함해 재정투융자 등을 통해 총 5조5000억엔(57조2000억원)을 확보해 2022년부터 운용할 계획이다. 여기에 추가로 민간의 기금 출연을 유도해 10조엔 규모로 키운 후 50년간 펀드를 운용한다는 구상이다.
문부과학성이 올해 7월 내놓은 '세계와 견주는 연구대학의 실현을 위한 대학펀드 자금운용의 개요'에 따르면, △연구력(양질의 논문수)의 저하 △박사과정 학생 감소 △젊은 연구자의 미래 불안정 △세계적 대학과의 자금력 격차 등을 일본의 대학경쟁력 저하 원인으로 꼽았다.
이에 따라 대학펀드의 가동을 통해 △재정 및 제도의 혁신적인 접근 △대학의 미래 연구기반 확보를 위한 안정적 자금력 강화 △세계적 대학에 상응하는 제도의 개혁 등을 목표로 제시했다. 고바야시 타카유키 과학기술담당 장관은 지난달 24일 내각회의 이후 기자회견에서 "이 제도는 10조엔 규모의 기금을 운용해 그 이익을 대학에 배분하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금의 운용수익률은 물가상승분 1.38%를 포함해 연 4.38%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식 65%, 채권 35%라는 큰 틀의 자금운용 계획도 내놨다. 초기에는 비교적 안전자산에 투자하면서 해외자산이나 리스크가 높은 자산으로 투자를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매년 3000억엔(3조1200억원) 규모의 수익을 낼 것으로 예상하고, 기금운용 수익으로 대학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대학에 대한 세부적인 지원계획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정부 총합과학기술혁신회의(GSTI)는 이달 10일 회의를 열어 지원 대학의 요건을 결정했다. '특정연구대학'(가칭)으로 불리는 지원대학은 △국내외 우수한 박사급 학생의 유치 △젊은 연구자가 독립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의 제공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경영회의체 설치 등을 충족해야 한다.
GSTI는 회의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활약할 수 있는 연구환경을 실현하기 위한 거버넌스의 개혁을 대학에 요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자금지원은 매년 수백억엔(수천억원) 단위로 이뤄질 전망이다. 다만 구체적인 액수는 대학의 외부자금 유치실적 등과 연계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특정연구대학으로 선정되면 기업과의 공동연구와 기부금 등으로 얻은 수입으로 연 3% 정도의 자체 수익 및 성장을 이뤄야 한다는 전제도 있어 논란이다.
한국에도 밀리는 일본 대학순위
일본 정부가 대학경쟁력 살리기에 나선 것은 그만큼 위기감이 높아서다. 영국의 교육전문지 타임스 하이머 에듀케이션(THE)이 발표한 2020년 세계대학 종합순위에 따르면, 일본은 도쿄대(36위)와 교토대(54위) 두 곳만 상위 200위 안에 들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순위는 칭화대(20위)가 선정됐고, 중국은 200위 안에 10개의 대학이 들어갔다. 한국도 서울대(54위)를 비롯해 6개 대학이 상위 200위 내에 이름을 올렸다.
국제적으로 인용되는 양질의 논문도 갈수록 줄고 있다. 인용이 많은 상위 10%의 논문수를 국가별로 살펴보면, 일본은 1996~1998년 세계 4위 수준에서 2016~2018년까지는 11위로 추락했다. 일본정부는 이미 2013년 "향후 10년 안에 세계 대학순위 100위 안에 10개 학교 이상을 목표로 하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대학들은 경쟁력 추락의 원인으로 안정적인 연구환경의 부재를 꼽는다. 특히 재정적 취약성이 주된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일본은 2004년 이후 국립대학이 법인화하면서 인건비와 연구비 등으로 충당하는 운영비 교부금이 크게 줄었다. 대학교부금 총액은 2004년 1조2415억엔(12조9100억원)에서 2021년 1조790억엔(11조2200억원)으로 13.1% 줄었다.
이러한 사정은 세계 정상급 대학과 커다란 격차를 드러낸다. 세계적 대학들은 최근 20년 동안 연구자금을 큰 폭으로 늘려왔고, 그 원동력은 외부의 기부와 함께 산학연계를 통한 자금을 기초로 대학이 독자적으로 기금을 운용하는 데 있다.
예컨대 미국 하버드대(4조5000억엔), 예일대(3조3000억엔), 영국 캠브리지대(1조엔) 등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기금을 자체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최고 명문인 국립 도쿄대는 150억엔 수준에 그친다. 사립 명문인 게이오대학(730억엔)과 와세다대학(300억엔)도 세계적 대학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국가주도 대학펀드에 불안감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대학살리기 프로젝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하버드대학 등은 기부를 통해 확보한 자기자본을 원천으로 운용하지만, 일본은 상환을 전제로 한 재정투융자를 원천으로 하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초저금리 상황에서 펀드의 손실은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아사히신문도 수천억원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면서 대학에 전제조건을 붙이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지원을 받은 대학은 연 3%의 사업실적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연 3%의 성장은 20년 후에 지금의 대학별 수입(대학병원 수입 제외)을 두배 이상 늘려야 한다는 얘기다. 대학펀드를 통해 연 수백억엔을 받더라도 스스로 추가적인 실적을 내기 위해 산학연계와 대학벤처 등으로 외부자금을 크게 늘려 나가야만 한다.
이 신문은 "대학이 사업수익을 내기 위해 첨단연구를 우선할 수밖에 없겠지만 시대를 바꾸는 획기적 연구성과는 초기에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에서 출발한다"면서 "자금 지원이 낭비로 끝날 가능성도 각오한 위에서 보다 통 큰 지원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라고 지적했다.
수도권대학과 지방대학 격차 확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정연구대학은 국립과 공립, 사립을 가리지 않고 응모가 가능하지만, 실제 선정 기준을 맞출 수 있는 곳은 수도권 상위권 대학에 집중되기 쉽다. 선정 과정에서 논문이 얼마나 인용됐는지 등을 개량적 지표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쿄대와 교토대 등 옛 제국대학이 선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편 일본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학과 연구소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경쟁력 회복은 어렵다는 진단이다.
지난 10월 일본의 28번째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마나베 슈쿠로 미국 프린스턴대학 선임연구원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나베 선임연구원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본의 뿌리 깊은 연구실 풍토와 관행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는 연구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후계자를 키우기보다 젊은 과학자를 소모하고 있다"며 "그래서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나베 연구원은 "미국은 학회에서 거리낌없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다. 어떤 학설에 반대하면 발표 석상에서 바로 문제점을 지적해 논쟁이 격렬해진다"며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환경이고, 연구자들은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