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 인재양성│(1) 혁신 인재양성 위한 대학교육 유연화
"전공과목 무늬만 남기고 파괴했다"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칸막이 뛰어넘는 융합형 교육과정 도입 … 인문계 학생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
4차산업혁명 가속에 따른 신기술 인재 양성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산업계를 중심으로 배터리·SW·시스템반도체 등 차세대 성장 분야의 인력 부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따라서 기업 수요를 넘어 기술 진보 자체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인재 육성을 위한 장기적 정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하지만 특정 산업을 예측해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방식으로는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과녁 맞히기식의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혁신을 이끌 전문인력의 빠른 양성과 함께 학생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능동적으로 학습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개인 맞춤형 학습 경험이 필요하다. 대학교육의 유연화가 시급한 이유다.
#1 공대생은 수학과 코딩을 배우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인문대생은 수학이 싫어서 여기 왔는데 그걸 왜 배워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지금은 수학과 코딩을 모르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다. (남호성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2 신성장 산업 부문에서의 인력 미스 매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반도체나 바이오 산업 등에서는 전문인력이 부족해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연구원 보고서, 2017)
#3 AI 특화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석사 이상의 전공자가 필요하지만 대학 학위과정이 순수 연구에 치우쳐 기업 현장이 원하는 실무형 인재 양성에는 미흡한 게 현실이다. (인공지능 K기업)
기업이 요구하는 직무능력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현장 수요에 맞는 인력 양성 체계는 여전히 취약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첨단기술 중심의 산업 구조 재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양성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전재식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반도체나 IT 중심의 산업 구조 전환으로 직무 수행 역량도 바뀌고 있는 추세"라며 "미래에는 학력보다 실무경험이나 창의성이 중요한 직무능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과 산업의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미래 핵심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의 필요성이 더욱 제기되고 있는 것. 하지만 경직된 대학교육이 여전히 인재 양성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대학 혁신 가로막는 규제와 칸막이 =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와 대학이 공급하는 인재 사이의 '미스 매칭'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학과 간 경계를 허물고 산업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제도 개선이 먼저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선택 과정에서 충분히 탐색하지 못한 채 결정을 한다"며 "우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전공 선택의 시기를 다양화하고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개발연구원 '대졸 노동시장 미스매치와 개선 방안'(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 신입생 설문조사 결과 자신의 전공을 바꾸고 싶다고 응답한 신입생 비중이 28.2%로 나타났다. 따라서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전공을 선택하거나 변경할 수 있도록 자유전공이나 융합학과 운영 등의 학사제도의 유연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전공별 정체성이 강한 데다 학과 간 칸막이가 높아 상호 교류가 쉽지 않다. 교수 역시 교사처럼 재교육을 통해 역량을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영어음성학을 가르치고 있는 남호성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려면 종전 방식으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전공과목부터 무늬만 남기고 파괴(?)했다"며 "언어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수학과 코딩을 접목해 새로운 과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인문계 학생들도 졸업과 동시에 바로 취업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학과 경계를 넘어서는 교수 채용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서울대 언어학과와 한국외대 ELLT학과가 대표적인 사례다. 어학과 공학을 병행하는 교수가 아닌 음성언어 처리 전문가인 공학 전문 교수 영입으로 제대로 된 언어공학 교육이 가능해졌다.
대체로 인문계의 경우 음성, 텍스트, 이미지 영상 분야 등이 공학 전문 교수가 필요한 영역으로 채용만으로도 학생들의 융합적 사고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백광현 중앙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 역시 "반도체 설계를 잘하려면 시스템은 물론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전자과 수업에서 철학과 교수와 함께 '마음공학'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며 "강의 교류는 물론 팀 교육이나 블럭 강의를 통해 학과 간 칸막이를 낮추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첨단분야 인재양성을 위한 융합적 사고는 학부과정부터 일찍 시작하는 게 개념을 받아들이기에 더 수월하다"며 "학부과정에서부터 교육과정의 혁신이 이뤄지도록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내가 설계하는 전공과 연구로 미래 역량 키운다 = 전 선임연구위원은 "기술 혁신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부적인 교육을 통해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에는 어려운 현실"이라며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대학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학생의 전공 선택권을 보장하고 융합교육과 연구활동을 위한 유연한 학사 제도와 학생별 특성을 고려한 지원이 중요해졌다.
대학들도 학생들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능동적인 학습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개인 맞춤형 학습 경험의 기회들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건국대는 학생들이 주전공 이외에 자신의 진로계획에 맞게 새로운 융합형 전공 교육과정을 직접 설계하고 학점 취득과 복수학위를 받을 수 있는 '자기설계 전공제'를 실시하고 있다. 지도교수와 전공 관련 전문가들의 심사를 통과하면 교육과정으로 정식 개설되고 이를 이수하면 학위를 준다. 건국대 학사팀 관계자는 "학생 스스로 종전에 편제되지 않은 전공이나 다수의 전공을 토대로 새로운 전공을 설계한 것"이라며 "지난해에는 민주시민 교육전공, 오디오콘텐츠 전공, 컴퓨터음악공학 전공 등을 승인했다"고 말했다.
학생설계 전공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도 시행하고 있다.
서울대는 2007년부터 '학생자율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 중심 자기 설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학생들이 탐구하고 싶은 통합적이거나 시사적인 주제에 대해 지도교수와 대학원 조교를 선정해 스스로 연구 활동이나 세미나 등을 진행한다. 학부 교양강의지만 대학원 수준의 교육과 연구, 토론이 이뤄져 학부 강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강원도의 서핑 문화를 연구한 학생의 연구논문이 해양공학회 논문집에 실리기도 했다.
김지현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지금은 전공 학과대로 졸업해서 취업하는 세상이 아니다"라며 "스스로 찾아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주도적 역량을 확장시켜 미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성장시킨다"고 말했다.
김기수 기자·홍혜경 리포터 hkho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