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에너지 충격, 글로벌경제 옥죈다
FT "러시아 침공에 전세계 에너지 가격 급등 … 고물가, 경제성장 저해 리스크 커져"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기 전에도, 유럽은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발을 동동 굴렀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벗어나면서 회복세를 보이던 경제가 다시 고꾸라질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7일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공격명령으로 그같은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유에서 휘발유, 천연가스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경제를 구동시키는 화석연료 가격은 기록적인 수준으로 오르고 있다. 러시아 공격이 시작된 지난 24일 브렌트유는 배럴당 106달러를 기록했다. 2014년 이후 최고가였다. 유럽 천연가스 역시 치솟았다. 유럽 수요의 1/3을 담당하는 러시아가 자국에 대한 새로운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가스 수출을 중단할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독일은 노르트스트림2 파이프라인 승인을 무기한 보류했고, 미국 등은 러시아를 은행간 통신협정(SWIFT)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IHS마킷' 부회장이자 에너지정치학에 대한 책 '뉴맵'(The New Map) 저자인 대니얼 예긴은 "다음 단계는 경제전쟁"이라며 "궁극적 결과는 글로벌 경제에 거대한 충격이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득을 얻는 측도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2005~2008년처럼 호황을 맞을 전망이다. 당시 유가급등으로 걸프국가들은 경제성장과 건설업 호황을 누렸다. 러시아 역시 혜택을 볼 입장이다. 원유매출로 국고를 채울 수 있게 된다. 2008년 320억달러 가치였던 러시아 국부펀드는 이달 초 1750억달러로 껑충 뛰었다. 이는 러시아 GDP의 약 10% 수준이다. 서구의 경제적 제재를 견딜 수 있는 유용한 방어막이 될 전망이다.
서구 국가들의 경우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안보 우려가 기후변화 정책보다 우선시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청정에너지 혁명을 외쳤지만,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맞아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 유가는 대통령의 최우선 순위 과제다.
미국 콜로라도광업대학 페인연구소 대표인 모간 바질리언은 "유가가 완만히 상승한다고 해도 정치적 파급효과는 크다"며 "저탄소경제를 지향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이 있지만, 현재의 근시안적 정치계에서 영향력은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위기에 취약한 에너지 시장
러시아의 공세는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가는 방아쇠였다. 하지만 국제유가를 지난 15개월 동안 두배 이상 급등하게 만든 배경은 수요공급 펀더멘털이라는 지적이다.
약 2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각국의 경제봉쇄가 시작됐다. 이는 글로벌 원유 수요를 무너뜨렸다. 주요 석유기업 경영진조차 글로벌 석유 소비가 정점을 지난 건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각국 정부가 시행한 팬데믹 부양책은 석유·가스 수요 회복의 순풍이 됐다. 미국 석유소비는 하루 2300만배럴에 육박했다. 글로벌 총 석유소비의 1/4에 달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세계가 올해 하루 1억60만배럴의 석유를 소비할 전망"이라며 "역대 최고치"라고 말했다.
시장 컨설팅 기업 '에너지 에스펙트'의 수석 애널리스트인 암리타 센은 "에너지 수요는 아직 저탄소 세계에 적응되지 않았다"며 "팬데믹은 석유수요를 감소시킨 게 아니라 억눌렀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각국이 경제 빗장을 속속 열면서 화석연료 소비가 폭발했다. 사람들은 밖에 나가길, 여행하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공급은 그같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2016~2019년 미국 셰일석유 생산량은 껑충 뛰었다. 전세계 추가 수요를 맞추는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2020년 유가 붕괴는 미국 셰일석유 업계를 강타했다. 투자자들이 속속 돈을 거둬들였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 셰일기업들은 새로운 착공에 돈을 투자하기보다 투자자 환원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연히 셰일석유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셰일생산기업인 '데번에너지' CEO 릭 문크리프는 "우리 모두는 교훈을 얻었다"며 "재무구조 개선을 지속할 것이다. 나뿐 아니라 동료 기업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석유생산은 오르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 이전 최고점 대비 11% 낮다. 글로벌 수요를 맞추기엔 턱없이 적다. 엑슨모빌과 BP, 기타 오일 메이저 기업들 역시 자본지출을 삼갔다. 주주들의 압력이 거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에너지 예측모델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지난해 IEA가 발표한 '2050년 탄소중립 로드맵' 보고서는 "탈탄소세계에서는 새로운 원유채굴 프로젝트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OPEC은 원유 공급량을 늘리면서 시장에 개입할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적 압력에도 사우디는 공급량 확대에 주저하고 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지난 18개월 동안 유가를 부양하기 위해 감산했던 OPEC이 공급량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과거 OPEC의 골칫거리는 약속한 할당량을 어기며 공급을 확대하던 회원국들이었지만 이제는 서아프리카 국가 일부, 심지어 러시아와 이라크도 충분한 석유를 뽑아올리는 데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위기가 닥치면 완충능력을 발휘하던 OPEC에 의존하던 원유시장은 좌불안석이다. JP모간체이스 애널리스트인 크리스티안 말렉은 "OPEC의 완충능력은 글로벌 총 생산량의 약 4%로 줄었다. 소비자들이 안정적 수준으로 보는 10%에서 크게 낮아졌다"고 지적했다.
여분의 생산능력이 부족해지면서 원유시장은 유난히 타이트해졌다고 트레이더들은 말한다.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래피규라'의 공동대표인 벤 루콕은 "현재 원유시장의 현물거래엔 상당한 할증금이 붙는다. 석유업계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제때 충분한 석유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로 향하는 수많은 시나리오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이란과의 핵협상 타결이 원유시장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 유가가 오르면 미국 셰일업계가 계획보다 빠르게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트래피규라의 루콕은 "휘발유와 기타 중간 증류유 등에 대한 수요가 큰 현재의 시장 동력은 2008년 상황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당시 브렌트유는 역대 최고가인 배럴당 147달러를 기록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면서 유가가 치솟는 모멘텀이었다.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처럼 당시에도 지정학적 갈등이 배경에 있었다.
러시아 가스공급 차질시 대체 어려워
천연가스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러시아 가스 수입 의존도는 막대하다. 러시아 가스는 유럽대륙 수요의 약 1/3을 차지한다. 러시아 침공이 시작되면서 유럽 가스 선물은 약 70% 가까이 상승해 메가와트시당 142유로를 기록했다. 1년 전엔 16유로에 불과했다.
컨설팅기업 'ICIS'의 글로벌 가스 애널리틱스 대표인 톰 마젝-맨서는 "러시아의 대 유럽 가스공급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유럽대륙 고객들과의 장기 공급계약을 지킬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독일이 노르트스트림2 승인을 취소하면서 상황을 낙관하긴 어렵다. 러시아 전직 대통령이자 현재 러시아 안보위원회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트위터에 "유럽인들이 곧 가스 1m³당 2000유로를 지불하는 신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글을 올리며 맞제재 가능성을 시사했다.
러시아 가스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대체가 쉽지 않다. 지난해 가스 가격이 치솟으면서 유럽은 호주와 미국 카타르 등에서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늘렸다. 하지만 이 나라들의 수출 능력도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다.
미국은 LNG 생산력을 늘리기 위해 '벤처 글로벌 LNG 캘커슈 패스'를 건설중이다. 조만간 수출을 시작할 계획이다. 대부분은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으로 향한다. 하지만 원유시장과 마찬가지로 최근 수년 간 새로운 LNG 생산능력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다. 빠르게 늘어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기 힘들다. 특히 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의 수요가 상당히 커졌다.
가스 수출국인 카타르도 수출 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카타르의 새로운 메가프로젝트는 2026년 본격 가동될 전망이다. 게다가 유럽은 LNG터미널 인프라와 관련해 아시아에 크게 뒤처졌다. ICIS의 마젝-맨서는 "공급측면에서 탄력성이 너무 적다"고 말했다.
커지는 인플레이션 압력
글로벌 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 때에 원유와 가스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팬데믹 최악의 순간이 지난 뒤부터 유럽과 북미, 아시아의 경제 선진국들은 기대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이는 전례없이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백신 공급으로 가능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소비자들의 상품 구매 열풍, 화석연료 제한 노력 등으로 이미 2021년부터 가스와 원유 가격이 상승하고 있었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과거 30년래 보지 못한 수준의 인플레이션 조짐이 일고 있다. 물가상승을 통제하려면 경제성장을 둔화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지난달 선진국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4.4%에서 올해 3.5%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 예측조차 올해 유가가 지난해 대비 5% 하락할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했다. 국제유가를 배럴당 평균 77달러로 상정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지난주 원유와 가스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전반적인 경제성장률은 다시 한 번 큰 조정을 받아야 할 전망이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닐 시어링은 "올해 배럴당 120~140달러에 달할 원유, 그에 상응해 가격이 상승할 가스 때문에 선진국 인플레이션은 더욱 자극 받을 것"이라며 "에너지 비용은 인플레이션을 추가적으로 약 2%p 밀어올릴 것이다. 많은 국가들 내 인플레이션은 10%에 육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국과 미국 등의 정치지도자들은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고 있다. 대선후보 때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난하던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원유 증산에 나서달라며 사우디에 특사들을 보내고 있다.
백악관은 이미 전략비축유를 방출하고 있다. 또 연방석유세를 인하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중이다. 청정에너지 혁명을 이끌겠다는 바이든의 약속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치다.
영국 유가도 계속 신고가를 기록중이다. 일반 가정들은 치솟는 난방비와 전기료에 신음하고 있다. 영국정부는 그동안 추진했던 '녹색 경제회복 전략' 대신 석유와 가스를 보다 많이 채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지난해 11월 COP26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화석연료 보조금을 폐지한다고 공언한 프랑스와 스페인은 석달이 지난 현재 유가 보조금을 다시 도입했다.
워싱턴 소재 컨설팅기업 '클리어뷰 에너지 파트너스'의 이사인 케빈 북은 "정권교체 우려가 기후변화대처 패러다임을 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FT 역시 "화석연료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정치권의 다짐은 표를 얻어야만 하는 현실 앞에 무기력해지고 있다"며 "여전히 지정학적 갈등이 에너지 가격에 거대한 충격을 가하는 세상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