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정원 확대(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 지방대 소멸 가속화

2022-07-21 11:06:15 게재

지방대학·시민사회단체 반발 확산 … "다른 분야 구조조정해 총정원 유지"

이과 쏠림에 문과 학문생태계 위기 … 재정 등 구체적인 지원책도 안보여

정부가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를 허용하자 지방 소멸의 가속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지방대학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지역인재 유출과 신입생 미충원 등 수도권 쏠림 현상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일부에서는 가뜩이나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문 분야의 학문 생태계가 고사 위기를 맞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20일 호남·영남·충청·강원·제주 시민사회단체는 합동 성명을 내고 "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은 국민에게 약속한 '지역 균형발전을 통한 지방시대'와 '지방대학 시대'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라며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놓은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7일 오후 손팻말을 든 박맹수 전북지역 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이 박순애 교육부 장관과 반도체 학과 관련 간담회를 하기 위해 여의도 한국교육시설안전원에 들어가고 있다. 수도권 대학 반도체 관련학과 증원에 반대하는 비수도권 '7개 권역 대학 총장협의회 연합'은 이날 박순애 장관과 여의도에서 비공개 간담회를 했다. 사진 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이들은 성명에서 "수도권 대학의 정원 증원을 허용하면 비수도권 청년들의 수도권 유입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라며 "학령인구 급감으로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고 있는 비수도권 지방대학을 위기로 몰아 종국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모두 공멸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교육 분야 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도 이날 논평을 내고 "지역균형개발을 거슬러 수도권 독점을 강화하고, 수도권 중심의 대학 서열화를 견고히 하는 조치"라며 "'수도권 편법증원'이라는 무리수는 반도체 인력 양성이라는 일차적 목적은 달성할지 몰라도 수도권 쏠림 현상, 지방대학 양극화, 대학 서열 강화와 같은 더 큰 사회 문제를 증폭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교육부는 향후 10년간 일반대와 전문대, 대학원, 직업계고 정원 확대를 통해 인력 4만5000명을 양성하는 내용의 '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2027년까지 일반대 2000명, 전문대 1000명, 대학원 1100명, 직업계고 1600명 총 5700명가량의 정원을 늘일 계획이다.

수요조사 결과 수도권 대학 14곳이 1266명을, 비수도권 대학 13곳이 611명을 각각 증원할 의향을 보였다.

◆지방사립대에는 '그림의 떡' = 정부는 "역량이 있는 대학은 지역 구분 없이 증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상대적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방대학을 배려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학령인구 감소로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지방 사립대학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방 사립대가 정원을 늘리더라도, 학생들이 반도체 기업이 몰려 있는 수도권 대학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립대인 목포대 반도체응용물리학과는 올해 정원 미달이었다. 또 전북 익산시 소재 사립대학인 원광대는 지난 3월 정원 미달로 2004년 설립한 반도체·디스플레이학부를 폐과하기로 결정했다. 이 외에도 지방 사립대 반도체 학과 상당수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2017학년도에도 정부가 AI 등 첨단기술 학과를 지원하는 '프라임 사업'을 통해 21개 학과가 신설됐고, 당시 발표 시점엔 상당한 이슈가 됐다"며 "6년이 지난 지금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사실상 신입생 선발에 어려움을 겪는 대학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반도체 관련 대학, 학과 간 양극화가 심화하고 대기업과 상위권대 위주로 반도체 관련 학과의 쏠림현상이 크게 나타날 것"이하라고 덧붙였다.

◆수도권 편법증원 비판도 = 지방대학들은 이보다도 수도권 대학 모집정원 총량이 증가한다는 점을 더 우려한다. 수도권 대학 정원이 증가하는 만큼 지방대학의 학생 모집난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방대 충원율은 92.3%였으며 학령인구가 대폭 감소하는 2024년에는 79%대로 낮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최소 1300명가량의 우수학생이 추가로 지방대학을 이탈한다는 것이다.

한 호남권 사립대 총장은 "수도권 대학 정원 총량이 늘면 그만큼 지방대 진학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덧셈, 뺄셈만 할 수 있는 어린이도 예상할 수 있는 결과"라면서 "수도권 정원 확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사립대 관계자는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학과 정원을 늘리려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에서 그만큼 구조조정을 해야 수도권과 지방이 상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정책이 반도체 관련 학과뿐 아니라 문과계열 학과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험생의 이과 쏠림 현상이 현재보다 크게 나타나 문과계열에서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지방대학들의 불만을 고려해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19일 "'이제는 지방대학 시대'라는 현 정부의 국정 과제에 따라 비수도권대학에 더 많은 재정 지원을 하겠다"면서 "'고등·평생교육지원 특별회계'를 신설해 지방대 지원을 대폭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초·중등 교육에 쓰이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재원 일부를 고등교육(대학)에 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가재정법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을 개정해야 하는 데다 교육계가 반발하고 있어 실효성이 높아 보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영남지역 한 사립대 총장은 "산업계 수요를 고려해 수도권대학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점을 수용하더라도 지방대학이 상대적으로 잘하는 분야를 육성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교육부 발표는 지원하겠다는 총론만 있고, 어떻게 지원하겠다는 각론은 아무것도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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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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