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현의 중남미 톺아보기
아르헨티나 한인동포사회의 공공외교
한때 여론조사에서는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외국인에 한국인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에 대한 비호감은 높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현지사회의 시선과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이제 아르헨티나 사회는 한인들을 주변인이 아닌 아르헨티나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식하며, 한국문화에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진 아르헨티나의 축구경기장이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2023년 국제축구연맹 20세 이하 월드컵에 한국의 20세 이하 청소년 국가대표팀이 4강에 진출해 이탈리아와 상대로 경기를 펼칠 때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들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양손엔 태극기를 흔들며 목청 높여 대한민국을 외쳤다.
한글로 적힌 선수들의 이름과 응원 구호 손팻말이 물결치면서 라플라타 경기장의 풍경은 마치 한국의 축구경기장이 연상될 정도로 온통 한국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한인회 단체와 한인기업, 한국대사관까지 합심해 응원단의 모집과 이동, 그리고 선수단이 최고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한국 대표팀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아르헨티나에 한국의 존재감과 응집력을 보여주었고, 한인 차세대들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위신과 위상 제고를 위해 한인 동포사회와 한국대사관이 완벽한 파트너십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팬데믹 시기 한인동포사회의 방역 연대
아르헨티나 한인들의 응집력과 솔선수범은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코로나19의 중국 우환 기원설로 아르헨티나 사회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비난 및 혐오가 확산되면서 한인들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자라는 비난을 듣거나 돌아다니지 말고 집안에 있으라는 경고를 받았고 택시 승차거부도 당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한인단체는 현지사회에 방역물품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대처했다. 한인들을 대상으로 약 10만달러를 모금해 아르헨티나 보건부 이민청 치안부 등의 연방정부기관과 시 정부의 주요 부처 및 지역병원, 경찰서 구청 등에 마스크를 기부했다. 현지 언론들은 한인들의 선행을 보도하며 이민공동체가 주체적으로 방역물품을 지원한 경우는 한인회가 유일하다면서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한인들의 연대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청년들은 SNS를 통해 마스크 제작 방법을 공유하고 마스크와 의료용 모자를 만들어 현지 병원에 기부하는 'CoreaSeUne#' 캠페인을 벌였다.
한인회는 위기상황에서 현지사회에 기여함으로써 한인들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한인들이 이기적인 이민자 집단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현지사회의 어려움과 연대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최근 우리사회의 최대 화두는 '소통'과 '공감'이다. 이러한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은 개인 간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 관계에서도 점차 커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자국에 대한 호의적이고 우호적인 이미지와 여론을 만들기 위해 외국의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공외교를 펼치고 있다.
공공외교가 전통적 외교와 구별되는 점은 외국의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며 정부뿐 아니라 민간인도 외교 행위자로 참여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외국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를 찾아 상호이해와 친밀도를 높이고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재외동포는 공공외교의 중요한 주체다. 재외동포는 한국과 거주국 문화·언어에 익숙하고 한국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어 한국에 대한 인지도와 매력을 확산시키는 현지 교두보로서 역할을 한다.
경계대상에서 높은 호감으로 인식변화
1905년 1000여명의 조선인이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계약직 노동자로 이주한 이래 현재 중남미에는 약 9만명의 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그중 아르헨티나에는 약 2만3000명의 동포가 살고 있으며, 이는 중남미에서는 브라질 다음이며 전세계적으로도 16번째 많은 숫자다. 60년 전 빈민가에서 날품을 팔던 한인들은 이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으로서 현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이민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한때 여론조사에서는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외국인에 한국인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에 대한 비호감은 높았다. 2003년 조사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아는 한국인이 없다'는 응답이 90%를 넘을 정도로 한국인과 교류도 없었고, '한국문화를 경험해봤다'는 응답은 13%에 불과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한인들에 대한 현지사회의 시선과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이제 아르헨티나 사회는 한인들을 주변인이 아닌 아르헨티나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식하며, 한국문화에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한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한국식당 한국식품점 한국제과점을 찾는 아르헨티나인들이 많아졌다.
한인회가 매년 개최하는 '한국의 날 행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다문화 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기행사가 됐다. '김치의 날'도 제정됐다.
10~20년 전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에서 묘사되는 한국인과 한국의 이미지는 '착취자' '범법자'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돈만 아는 민족' 등 부정적이었으나, 최근 언론이 다루는 한국과 관련된 주제는 '한류' 'K-팝' '영화' '한식' '아르헨티나 한인사회의 성공'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됐다.
아르헨티나 유력일간지 '클라린'과 '라나시온'에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는 것은 이제는 놀랄 일이 아니다. 지상파에서 한국드라마와 K-팝 경연대회가 방영되고 한국의 음식과 한국문화가 소개되며 한국문화에 대한 높은 호감과 애정을 드러낸다.
아르헨티나는 문화적 우월주의가 강한 나라로 과거에는 한국문화를 차별적으로 하등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의 문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중남미 최초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설립된 한국문화원의 문화강좌는 경쟁이 치열해 등록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인사회와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는 한인사회의 개방성과 현지사회와의 연결성 증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이민 차세대의 주류사회 진출 증가와 한류 영향으로 한인사회의 개방성이 증가했다. 과거 의류업에 집중되었던 직업구조가 최근 아르헨티나 주류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의료 법조 정치 경제 예술 등에 진출하는 차세대 한인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재외동포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필요
21세기 세계정치의 변화 중 하나는 권력이 물리적 힘이 아닌 관계 또는 상호작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상호이익이 되는 좋은 관계가 권력의 원천인 셈이다. 외교에서 외국대중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점차 중시되는 시점에서 언어 문화 가치 연대의 차원에서 모국과 거주국 양쪽의 경험을 가진 재외동포는 효과적인 공공외교의 자산이다.
최근 설문조사에서 현지인들은 한인 이민자에 대해 높은 호감과 신뢰를 나타냈으며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한인들은 현지인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소통하기 때문에 한국의 매력을 아르헨티나 사회에 가장 효과적으로 투영할 수 있는 주체다.
얼마 전 주한 아르헨티나 신임대사가 한국 부임을 앞두고 한인타운에서 한인회의 단체장들과 만났다.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한국에 아르헨티나를 대표하고 한국과 아르헨티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도 공공외교의 최전선에 있는 재외동포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