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산책

아세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2023-12-07 11:31:58 게재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지난달 연재에서 필자는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는 찰떡궁합이라고 썼다. 궁합이 좋아 결혼을 하더라도 반드시 평등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듯이, 한국과 아세안 관계도 쌍방에게 똑같은 정도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한-아세안관계가 한국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동해왔다는 평가에 큰 이견은 없다.

가장 중요한 지표는 무역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한국의 대아세안국 무역흑자는 한국의 대외무역 흑자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큰 규모를 기록했다. 게다가 수출입 내역을 보면 교역조건이 한국에 유리한 품목들로 구성돼 있어, 한-아세안 무역은 기본적으로 "불평등교환"이라는 좌파 경제학자들의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또한 한국과 아세안 간 협력이 각자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에게 훨씬 더 중요하다. 아세안에서 한국이 갖는 의미보다 한국에서 아세안이 갖는 의미가 더 크다는 말이다. 지난 10년간 한-아세안 무역은 한국 총교역의 2위를 차지했지만, 아세안 총교역의 5~8위에 머물렀다. 아세안은 한국의 해외투자에서 줄곧 1~3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에 대한 아세안 국가의 해외투자는 미미하다.

한중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동남아는 한국인들이 단연 선호하는 관광지가 됐다.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 연간 1000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동남아를 방문했다. 동남아인들의 한국 방문은 이의 20~25% 수준에 불과하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세안만큼 공식관계 진전된 곳 없어

그래서 한국은 지난 40여년 동안 아세안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영사·대사관계 등 공식적 외교관계를 확대 격상해온 것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영역에서 실질적 교류에 앞장서 온 기업인 이주노동자 관광객 문화예술인 유학생들을 지원·후원하는 일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한국은 1949년 필리핀과 첫 수교를 한 이래 2002년 유일한 아세안 비회원국 동티모르와 수교하면서 모든 동남아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1967년 창립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즉 아세안이 19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기지개를 켜고 지역협력체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자, 한국은 1989년 부문 대화상대국으로 출발해 1991년 완전 대화상대국의 지위를 획득해 명실상부한 아세안의 주요 역외 파트너가 됐다. 그로부터 지난 35년 사이 한국과 아세안은 2004년 포괄적 협력동반자관계, 2010년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거쳐 내년에는 드디어 아세안이 대화상대국과 맺는 최고 단계 파트너십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식어와 공식 명칭의 지속적인 격상은 지난 50여년 사이 급속히 성장, 심화해 온 한국과 동남아 개별국가, 한국과 지역협력체 아세안 간의 관계를 반영함과 동시에 이 중요한 관계에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었다.

우리와 관계를 맺어 온 이른바 주변 4강을 비롯한 어떤 나라와 지역도 아세안만큼 실질적이면서 공식적인 관계로 발빠르게 진전돼 온 곳은 없다. 아울러 이렇게 양자관계가 발전해 오는 동안 실질적 협력과 교류의 증대는 물론이고 상대국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나 호감도 또한 동반상승해 온 곳은 더욱 없다. 한일관계는 물론이고, 우리의 대미 대중 대러관계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긍정적 부정적 반응을 동시에 낳고 있는 것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주변 4강에 대한 우리 국민 감정의 양면성과 집권정당의 이념적 성향과 맞물려, 우리의 4강 외교도 분열과 혼란을 빚어왔다.

4강 외교와 대조적으로 우리의 대동남아, 대아세안 외교가 보수 진보정당의 외교기조와는 무관하게 항상 초당적 입장을 견지해 온 것은 국익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미안보동맹을 축으로 한 대미, 대일외교에 집중했던 권위주의 정부와 달리 민주화 정부들은 공산권 동아시아 자원보유국 동남아시아 아시아태평양으로 지역적 다변화를 꾀해 왔고, 정권교체를 거듭할수록 동남아시아와 아세안은 다변화된 외교기조의 중요한 파트너로 자리잡게 됐다. 특히 문재인정부의 신남방정책과 윤석열정부의 한아세안연대구상(KASI)는 다같이 한-아세안 관계를 우리 외교의 핵심적인 축의 하나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대아세안정책의 초당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정파 이념 초월한 아세안 중시 외교

다행히 대아세안외교 중시는 정파와 이념을 초월한 외교적 합의사항이 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구현할 것인지는 외교당국은 물론이고 아세안·동남아 전문가들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와 외교부가 취한 대아세안외교의 수단은 대체로 세가지에 집중돼 있다.

첫째는 물질주의적 접근이다. 한아세안협력기금(AKCF)과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한 물적지원이다. AKCF는 1990년 연간 100만달러로 시작된 이래 올해 1700만달러로 증액돼 왔고, 지금 정부는 임기말까지 3200만달러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연간 30억달러에 달하는 한국 ODA에서 동남아 국가에 대한 원조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접근은 한-아세안 관계의 중심은 경제협력이고 여기에서 무역흑자를 통해 큰 이득을 본 만큼 그 일부를 역시 물적원조를 통해 돌려준다는 물질주의적 사고가 기저에 깔려 있다.

두번째는 정상외교다. 지난 20여년 동안 동남아는 미국을 제외한 어떠한 지역보다도 우리 정상이 빈번하게 방문한 곳이다. 특히 이명박 문재인 대통령이 동남아 국가를 방문한 숫자는 다른 어떤 나라의 지도자를 압도했다. 동남아 개별국가와 양자회담이나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외에도 APEC, G20 등 다른 다자회의도 동남아 국가에서 개최되면서 대동남아 정상외교는 더욱 잦아지고 있다. 한-동남아국가 양자, 한-아세안 다자 관계에 관한 중요한 결정이나 선언이 주로 정상회의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가장 중요한 정상회의는 2009년, 2014년, 2019년 세차례에 걸쳐 제주와 부산에서 개최됐던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였다.

마지막으로 상징주의적 접근이다. 이 접근은 한-아세안, 한-동남아 개별국가 간의 공식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격상시켜 오면서 그에 걸맞은 외교적 수사로 장식하는 방식이다. 아세안을 포괄적 협력 동반자, 전략적 동반자, 포괄적 전략동반자로 갈수록 강도를 높여 호칭해온 것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을 포괄적 전략동반자, 특별 전략적 동반자, 전략적 동반자 등으로 부르며 특수한 관계를 강조해온 것이다.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는 슬로건으로 '실질적 관계, 영원한 우정' '신뢰와 행복의 동반자' '평화를 향한 동행, 모두를 위한 번영'을 택했는데, 그 속에서는 나름 당시 정부의 국정철학도 담고 있었다.

그동안의 대아세안 외교정책 반성해야

필자는 우리 대동남아, 대아세안 외교가 이 단조로운 세가지 접근에서 벗어나 좀 더 독창적이고 다면적인 전략을 구상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경제협력의 손익계산서 상에 나타난 이익을 단순히 원조로 돌려주거나, 명분 약한 정상 방문을 반복하거나, 실질적인 관계보다 외교적 수사로만 포장하는 접근법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이번 부산엑스포 유치 결정 표결에서 아세안 회원국 중 한국에 표를 던진 나라가 단 한나라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소문은 정말 소문이기를 바란다. 수도 없이 동반자 동행 우정 신뢰 연대를 외친 결과가 이렇다면 그동안 우리의 대아세안 외교와 정책은 일방적인 구애에 불과했던가? 지나치게 감성주의적으로 스킨십만 계속한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 한국의 생존과 미래에 매우 중요한 파트너인 아세안과의 관계에서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안 것, 잘못 생각한 것, 잘못 행동한 것은 없는지 냉철히 되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