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 … 성난 독일인들

2024-01-17 11:31:19 게재

블룸버그통신 "부의 분배 측면서 불평등 극심 … 조세제도 개혁이 한 방법"

독일정부의 보조금 삭감에 분노한 농민들이 수도 베를린에까지 들이닥쳤다. 독일 dpa통신 등에 따르면 일주일 전부터 독일 전역의 도로를 봉쇄하며 시위를 벌이던 독일 농민들은 15일(현지시각) 베를린 브란덴부르크성에 수천대의 트랙터를 집결시키며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트랙터에 '농부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는 등의 현수막을 걸고 실력행사를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제조업 운수 교육 등 여러 업종 노동자들이 경제성장 부진과 고물가에 항의하며 대정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지난해 말 팬데믹 전용 예산 불용액을 산업지원을 위한 기후전환기금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연방정부 2024년 예산안을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올해 예산에서 170억유로를 절감해야 하는 연방정부가 농민 보조금 등 각종 지출을 줄이면서 사회적 저항에 불을 지폈다.


2차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은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의 선도국이었다. 현재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경제가 침체되면서 사회적 조화 전통이 반목과 분열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16일 "독일의 불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같은 갈등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2021년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 조사에 따르면 상위 10%에 속하는 가구의 순자산은 최소 72만5000유로(79만3000달러)로, 이들은 독일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갖고 있다. 반면 하위 40% 가구는 최대 4만4000유로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화된 인프라, 높은 인플레이션, 값싼 러시아산 가스 수입중단 등 독일경제를 짓누르는 요소가 수두룩하다. 경제불안으로 독일인의 생활수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부가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지난 15일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농업 부문 보조금 삭감 계획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극우정당 지지율 높아지는 배경

이런 상황은 극우정당이 득세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지지자들은 독일의 재정난과 경제난을 이민자 유입 탓으로 돌리며 각종시위에 동참해 반정부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 응답자의 1/4이 '오늘 선거가 실시된다면 AfD에 투표하겠다'는 상황이다. 내년 총선 전 이 수치가 증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독일 빌트지 최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 64%가 '정권교체를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른바 '신호등 연정'으로 불리는 연립내각에 소속된 3개정당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로 충돌하는 상황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부추긴다. 자유민주당은 차입반대 기조를 밀어붙이고 있다. 반면 사회민주당은 복지지출 확대를 약속한다. 녹색당은 강력한 탈탄소화 추진 의지를 다짐한다. 각 정당의 불협화음은 사실상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논쟁과 타협으로 귀결되고 있다.

성난 군중들은 도로 곳곳에 3당 집권연정을 상징하는 신호등을 교수대에 매달아 분노를 표출했다. 독일 경제부 장관인 로베르트 하벡은 성난 군중들의 항의시위로 여객선에서 발이 묶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들의 분노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광적인 지지자들,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대와 유사하다는 지적이다. 소셜미디어로 증폭되고 주류언론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적 갈등은 시위대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결속력과 공동번영 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독일로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공동번영은 부분적으로 신화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유럽 기준으로 독일의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독일국민의 순자산 중앙값은 약 10만6000유로로, 유로존 지역 중앙값인 15만유로에 크게 미달한다.

물론 독일인들이 양질의 공공서비스 덕분에 많은 돈이 없어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 주에서는 탁아소와 공립대학 등록금이 무료다. 최근 독일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쟁취했고, 저축자들은 은행예금으로 높은 이자를 받는다. 농부들의 평균 수익도 올랐다.

하지만 분데스방크에 따르면 독일 세입자 가구의 평균 자산은 1만6000유로에 불과하다. 주택을 소유한 가구의 평균 자산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부동산가격이 치솟으면서 세입자들의 소외감은 더욱 커졌다.

한편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독일인은 6명 중 1명에 그친다. 2019년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올라프 숄츠 현 독일 총리는 자신의 모든 돈을 수익률이 낮은 은행계좌에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블룸버그는 "숄츠 총리의 고백은 저축을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동정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투자에 대한 독일의 자기패배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독일 부의 대부분은 '미텔슈탄트'라 불리는 가족소유의 민간 중소기업이 보유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텔슈탄트는 일자리 창출의 원동력이다. 이들의 근검절약은 경상수지 흑자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는 독일이 종종 비판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소득불평등을 키우고 국내소비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과거 오랫동안 지속된 독일의 수출호황과 재정흑자는 이러한 단점을 상쇄했다. 하지만 이제 독일 경제모델의 약점이 분명해졌다. 15일 발표된 공식추산에 따르면 독일의 2023년 생산량은 0.3% 위축됐다. 블룸버그가 설문조사한 경제학자들은 올해 독일경제가 0.3% 성장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인구고령화도 독일 사회보험 시스템에도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연금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부예산 중 연금에 할당돼야 할 비중은 현재 25%에서 2050년 50% 이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독일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은 독일 국부펀드를 글로벌 주식에 투자해 수익률을 높이는 동시에 '부과방식(pay-as-you-go)' 연금체계를 늘리면 연금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재정에 주는 부담을 덜어내기엔 충분치 않을 전망이다.

독일 정치권이 점점 더 분열하고 있기에 불평등을 줄이고 자산증식을 확대하기 위한 추가 개혁 가능성은 낙관적이지 않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부족한 상황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은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자본의 더 넓은 분배를 촉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금노동자에 불리한 조세체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독일 주요 경제학자들은 오랫동안 독일의 조세체계가 '유리지갑' 임금노동자에 지나치게 불리한 반면 재산세와 상속세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낮다고 비판해 왔다. 독일은 일자리 창출과 투자에 대한 의지가 약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업 소유주에 대한 상속세를 전면적으로 면제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너무 관대해 결과적으로 고액유산에 대한 세금이 소액유증보다 낮은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부의 분산이 반드시 부유층으로부터 부를 빼앗는 의미일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영국의 개인저축계좌(ISA)나 미국의 401k 및 비과세개인연금적금처럼 주식시장에 투자하면서 절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AfD 지지율이 높아지는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많은 저소득층이 재산세와 부유세 상속세에 반대하는 AfD의 정책에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도 AfD를 지지한다. 블룸버그는 "더 많은 사람이 경제적 번영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어야 극우정당에 대한 막무가내 지지를 중화시키고 현재 독일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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