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상실의 시대
‘계엄의 밤’을 보낸 지 한달이 넘었다. 대통령이 체포와 수사를 피하며 ‘관저농성’을 한 지도 곧 한달이 된다. 나라는 온통 찢어져 너덜너덜해졌다. 바라보는 국민들은 새해가 시작됐어도 여전히 작년의 터널에 갇힌 채 뭔지 모를 상실감과 울컥하는 분노에 진이 빠질 지경이다.
얼마 전 만난 공무원들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중 한명은 경찰이었는데 계엄 이후 부쩍 경찰교육을 받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교육생 시절 세뇌당하듯 늘상 듣던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라는 구절이 의문문과 함께 떠오른단다. 그 조국은 어디로 갔나, 내가 알던 대한민국은 모두 거짓이었나. 계엄 사실을 언론에서 보고 알았다던 경찰청장이 계엄 선포 3시간 전 안가에서 대통령과 만났다는 보도를 보고 나서는 “경찰을 계속 해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했다.
국회에서 일하는 한 어공은 그날의 기억 테이프를 계속 머릿속에서 돌려보게 된다고 했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국회에 도착해 담을 타고 넘어가려고 국회 안쪽 동향을 살피다가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에 흠칫 몸을 숨긴 기억. 굉음을 내며 국회 안으로 진입하는 헬기가 일으킨 바람에 날아오른 낙엽을 뒤집어쓰며 느낀 분노. 계엄 해제 후에도 언제 또 군인들이 처들어올지 몰라 국회 본회의장 문앞에서 밤을 새며 느낀 불안감.
분명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날 밤을 지내며 무언가를 하나씩 잃었다. K자 붙은 각종 신드롬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 그래도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거라는 믿음, 공무원들이라면 자신이 일하는 조직이 최소한 비겁하지는 않을 거라는 신뢰, 그 모든 것이 어디론가 흩어졌다.
더 끔찍한 건 그 상실감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철조망과 차벽으로 관저를 두르고 숨어 있는 대통령, 경호처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공수처, 혹시라도 유혈사태가 있을까 온국민이 마음 졸이고 있는데 가슴에 총을 맞더라도 대통령을 끌어내라는 극언을 하는 야당 의원, 여의도 경호처라도 되는 줄 아는지 부끄러움도 모르고 관저 앞으로 집결한 여당 의원들. 위기가 닥치니 이곳저곳이 쉴 새 없이 밑바닥을 드러낸다. 국민들은 눈 돌릴 새도 없이 대한민국의 민낯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할까. 계엄 이후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국민들 숨통을 죄고 있는데 더 가기 전에, 더 숨이 막혀 질식하기 전에 대통령이 결자해지해야 한다.
수사기관의 출석요구에 응해 대통령이 먼저 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라. 법적 정치적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켜라.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지만 책무는 정지되지 않았다. 제발 대통령다운 모습을 이제라도 보여달라.
김형선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