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처분 의도 없다면 사기죄 아냐”
1심, 징역 10개월 … 2심, 집유로 감형
보이스피싱 수거책, 사기혐의 무죄
대법 “피해자가 돈 넘겨주지 않아”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로 피해자 집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둔 현금을 가져간 행위는 ‘사기죄’에 해당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피해자가 현금을 넘겨준 것은 아니었기에 사기죄 성립에 필요한 ‘피해자의 처분행위’가 없었다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노경필 대법관)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일부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2일 밝혔다.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책으로 일하며 2021년 11월 4차례에 걸쳐 8000여만원의 현금을 피해자들로부터 수거해간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성명불상의 조직원은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해 각각 다른 피해자에게 “아파트 대출용 공탁금 1500만원, 대출 변제금 1160만원을 내야한다”고 속였고, A씨는 이를 모두 전달받았다. 또 금융사 직원을 사칭한 조직원에게 연락을 받은 또 다른 피해자들은 각각 1500만원, 4000만원을 A씨에게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해 징역 10개월을 선고했지만, 2심은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가 A씨의 혐의 중 11월 24일 한 피해자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당시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부터 “계좌 비밀번호가 유출돼 수사를 위해 지문 채취를 해야 한다. 현금을 찾아서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두면 지문을 감식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피해자는 이에 현금 4000만원을 비닐봉지에 담아 현관문에 걸어뒀고, A씨는 조직원의 지시를 받아 이를 챙겼다.
법원은 피해자가 지문 감식을 위해 현금을 걸어뒀고, 현관문을 열면 언제든 확인할 수 있었다며 A씨의 사기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사기 혐의 요건인 ‘피해자의 처분 행위 또는 처분 의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며 이를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자신의 집 현관문 손잡이에 현금 4000만원을 넣은 비닐봉지를 걸어둔 상태에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었다”며 “이러한 피해자의 행위만으로 현금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가 A씨에게 이전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사기죄는 범인에게 속아 착오에 빠진 피해자가 재물의 지배권을 사실상 범인에게 넘기는 처분 행위가 필요한데, 이 사건 피해자의 경우 현금을 A씨 등에게 건네 주려고 집 밖에 걸어둔 것은 아니었기에 사기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취지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