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구조개혁 주장하며 조세·금융·정부개혁엔 침묵

2025-02-14 13:00:15 게재

성장잠재력 견인 위해 노동·교육 등 제도개선 목소리

“시끄러운 한은 되자”…F4회의 부처 현안에는 눈감아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 대내 정치적 혼돈과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이 의문이다. 특히 권력공백기가 길어지면서 중앙은행 역할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 본연의 임무인 통화정책과 최종 대부자 역할, 거시경제 구조개혁 과제 제시 등을 중심으로 올해 과제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한국은행이 구조개혁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창용 총재 취임이후 시끄러운 한은을 내걸고 각종 사회·경제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있다. 명분은 지속가능한 성장잠재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정부는 지난해 말 비상계엄 사태 이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사실상 매일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관가에서는 이를 F4회의라고 한다. 사진 왼쪽부터 이복현 금감원장, 이창용 한은 총재, 최상목 권한대행, 김병환 금융위원장. 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하지만 다양한 개혁 현안 가운데 유독 한은 총재가 구성원인 이른바 F4 참여 부처와 관련된 개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F4회의는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 참여하는 ‘거시경제·금융현안회의’를 말한다.

◆지난해 100건 넘는 연구보고서 쏟아내 = 한국은행은 지난해 연간 100건 안팎의 각종 보고서를 내놨다. 'BOK이슈노트'와 'BOK경제연구'가 50건 안팎, 이 총재 취임 이후 활성화된 한은 블로그에 게재한 글도 40여건에 이른다.

예컨대 지난해 연말 내놓은 BOK이슈노트 ‘우리경제의 잠재성장률과 향후 전망’ 등은 우리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고, 구조개혁이 긴박한 문제인지를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는 “잠재성장률이 2024~26년에 2% 수준으로 추정됐다”면서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고, 미래 경제구조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 보고서가 신뢰성을 갖는데는 △풍부한 원천 데이터 △우수한 인력 △과학적 분석모델 등 철저히 합리적이고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해 현안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은은 2000여명의 직원 가운데 박사급 인력 200여명과 석사급 400여명을 포함해 경제와 경영 등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가 어느 연구기관보다 많다. 이들이 산업과 금융, 노동 등 다양한 분야의 원천 자료를 기초로 첨단 분석모형을 통해 물가와 성장률, 국제수지와 고용 등 거시경제 변수의 경로를 예측하고 정책결정에 기여하고 있다.

여기에 2022년 4월 취임한 이 총재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면서 세간을 시끄럽게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총재는 취임 때부터 중앙은행이 통화정책만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려면 구조개혁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이 총재는 사석에서도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갈수록 쇠퇴하는 점을 우려하며 청년들에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국이 일본과 비슷한 경로로 가고 있지만 우리 청년들의 진취적 역동성이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면서 “우리가 잘만 하면 일본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평론가적 훈수에 멈춰선 안돼"= 한은이 주요 경제 및 사회적 개혁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다보니 일부에서는 ‘월권’ 또는 ‘비현실적 대안’ 등의 비판도 나온다.

예컨대 지난해 3월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던 ‘돌봄서비스 인력난 완화 방안’은 고용노동부와 노동계 등의 반발을 샀다. 당시 고용노동부 고위관계자는 “사전에 협의도 없이 발표해 아쉽다”며 “임금차별을 금지한 노동법의 기본 취지를 벗어나고 예측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돌봄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하면 이들이 정해진 일터를 이탈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었다.

지난해 6월 발표한 ‘우리나라 물가 수준의 특징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농산물 등의 수입을 확대해 물가를 안정화시키자’는 취지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직접 나서 “검역 문제와 농가의 생산기반 붕괴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 총재는 일부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이 있더라도 오히려 건강한 논쟁은 바람직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은 올해도 정년연장 문제 등 노동현안을 비롯해 다양한 경제 및 사회적 개혁과제를 적극 제시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은이 각종 현안에 대해 ‘평론가’나 ‘훈수꾼’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련 부처와 국회, 노조, 소비자단체 등 이해관계자와 접촉을 더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은 내부에서도 “한은이 제시한 개혁 과제가 구체적으로 법이나 제도의 개선으로 이어진 사례는 사실상 없다”며 “제도적 성과가 없으면 지속적으로 양질의 연구결과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자성도 나온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한은 고위 관계자는 “한은이 정부 기구가 아니고, 법안 발의권도 없는 한계가 있지만 현안에 대해 입장을 내기 전에 관련 부처나 국회를 찾아가 충분히 설명하고 의견을 구한다”며 “앞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더 성실하게 사전에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정부 때도 부동산·최저임금 등에 침묵 = 한은이 경제 및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유독 침묵하는 분야가 있다.

조세 및 재정 분야와 금융 현안이다. 예컨대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30조원 이상의 세수 결손이 발생해 2년 연속 세수추계를 잘못한 것과 관련 입을 다물고 있다. 한은 내부에서도 거시경제 예측에서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세수추계도 제대로 못하는 것에 대해 한심하다는 분위기도 읽힌다. 정부 재정운용에서 가장 기초적인 출발부터 헛발질하는 기재부에 대해 지적할 것은 해야한다(한은 팀장급 인사)는 지적도 있다.

구조개혁을 위해 수반되는 조세나 재정 관련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도 눈을 감고 있다. 금융시장 최대 현안인 금융투자소득세와 공매도, 밸류업 논란 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21대 국회에서 금융위가 추진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을 두고 강하게 반대했던 것과 대비된다. 당시 전자금융법 개정안은 결제와 청산업무에 대한 감독권을 금융위가 갖도록 해 한은이 가지고 있던 기존 관할권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위기가 팽배했다.

이에 대해 한은 고위 관계자는 "개혁과제를 제기하는 데서 제한은 없다는 게 기본방침"이라면서도 "금융 현안 등에 대해 내부 인력문제 등 준비가 덜 된 점도 있다"고 했다.

한은이 이처럼 예민하고 난감한 현안에는 침묵했던 사례도 있다. 문재인정부 때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최저임금 대폭 인상으로 청년 아르바이트 등의 일자리가 줄어 사회문제화됐던 때도 현안에 눈을 감았다.

그랬던 한은은 문재인정부 중반 이후 최저임금 대폭 인상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관련 보고서를 무더기로 내놓기 시작했다. 한은은 당시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등의 보고서를 10여건 이상 잇따라 발표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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