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칼럼

미중, 패권다툼 속에서도 기업 우대하는데 한국은

2025-03-10 13:00:01 게재

지난달 미국을 찾은 우리나라 기업인 사절단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을 어렵게 만났다. 당초 면담 약속이 일방 취소됐다.이틀간의 일정이 끝난 다음날에야 30분을 할애 받았다. 생색내듯 이뤄진 면담에서 러트릭 장관은 10억달러 이상 투자해야 환경평가·안보심사 등을 간소화하는 패스트트랙을 적용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투자를 약속하면 1년 내 착공하고, 트럼프행정부 임기 내 성과를 내야 한다고도 했다.

한국정부는 10억달러가 투자하한선이 아닌 ‘투자를 많이 해 달라’는 뜻일 거라며 거들었다. 하지만 우리 기업이 1억달러를 들여 미국 조선소를 인수하는 등의 투자성과를 강조하는 가운데 10억달러를 언급함으로써 ‘그 정도론 부족하다’는 의미로 읽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노골적이었다. 의회 연설에서 직전 정부의 반도체법을 “끔찍하다”며 폐지 의사를 재확인했다. 미국 공장을 짓는 조건으로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약속한 삼성전자(47억5000만달러) SK하이닉스(4억5800만달러)의 보조금 지급이 없던 일이 될 수 있음이다. 게다가 자국 기업 엑손모빌이 참여했다가 경제성이 떨어져 그만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 참여를 강권했다. 법까지 만들어 규정한 반도체 보조금은 못 주겠다면서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들여 가스관을 건설하고 다른 공장도 지으라니 지독한 ‘자국 이기주의’다.

부동산사업가 출신인 트럼프의 친(親)기업 마인드는 각별하다. 대통령 취임식 때 정부효율부 수장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팀 쿡 애플 CEO 등 빅테크 기업 총수들을 앞자리 VIP석에 배치했다.

미국의 홀대 속 각자도생하는 기업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부터 관세전쟁과 기술패권 경쟁을 벌여온 중국도 기업인을 우대한다. 지난달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추가 10% 관세 부과에 맞서 중국이 보복관세 조치를 취하며 2차 미중 관세전쟁이 발발한 일주일 뒤 베이징에서 민영기업 좌담회가 열렸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재한 회의에 미국 기업 오픈AI의 대항마로 중국 토종 인공지능(AI) 모델을 개발한 스타트업인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이 참석했다.

나이 마흔인 ‘젊은 영웅’ 량원펑만이 아니었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의 마윈 창업자, 중국 국민 앱 위챗을 보유한 텐센트의 마화텅 창업자,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은 통신장비 제조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 세계 전기차 판매 1위 기업 BYD의 왕촨푸 회장, 세계 최대 배터리 생산업체 CATL의 쩡위췬 회장, 중국 최대 가전업체 샤오미의 레이쥔 창업자도 좌담회장 전면에 자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최근 각광받는 정보기술(IT) 플랫폼 및 미국과의 기술패권 다툼 선봉에 선 첨단산업 분야 기업들의 리더라는 점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터진 1차 미중 관세전쟁 열 달 뒤, 2018년 11월 소집한 첫 민영기업 좌담회에 불렀던 완커·헝다·비구이위안 등 부동산개발 기업들은 배제됐다. 중국 경제의 성장엔진이자 격화일로인 미국의 압박과 고립 작전에 맞서는 중국 정부의 산업정책이 읽힌다.

한국은 어떤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석열 대통령은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막대한 경제안보 리스크를 자초했다. 국정 리더십이 망가진 상태에서 관료사회는 복지부동하며 재탕삼탕 정책을 일삼고, 기업들은 각자도생하는 실정이다.

정부가 5일 50조원 규모 첨단전략산업기금 신설 방안을 발표했다. 반도체 바이오 AI 등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최대 규모 지원책이라지만 장기적인 산업경쟁력 강화 청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AI 3대 강국’ 도약을 선언한 정부는 중국 딥시크를 보고서야 추가경정예산안에 AI 예산 2조원을 잡았다. 하지만 연내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장 구입 등 단기적·지엽적 계획을 내놨을 뿐 내용이 빈약하다. 게다가 주 52시간 근로 예외와 전 국민 25만원 소비쿠폰 지급 문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여야정 국정협의회가 파행하며 추경안 논의도 중단됐다.

급락한 민주주의 지수…경제 악영향 우려

이런 판에 지난해 한국의 민주주의 성숙도 순위가 32위로 전년보다 10계단 미끄러졌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EIU)의 민주주의 지수 평가에서 10점 만점에 7.75점을 받았다. 그 결과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추락했다.

내란 사태로 인한 탄핵정국 불안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매겨진 최악의 민주주의 성적표는 국가·기업의 신용등급과 주가 등 여타 분야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불길한 신호다. 삼일절 연휴에 겨울가뭄을 해소하고 봄을 깨우며 산불도 막는 단비와 눈이 내렸다. 민생을 보듬고, 경제심리를 북돋고, 민주주의도 회복하는 ‘정치 단비’ ‘정책 훈풍’은 과연 언제 내리고 불어올까.

가천대 겸임교수

경제저널리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