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미술은 교권과 왕권 강화의 홍보 수단이었다

2025-03-13 15:46:01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5)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이에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분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과 과도기적 매너리즘 미술을 살펴보았다.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미술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된 문예부흥 운동의 종식과 함께 종언을 고했으며, 17~18세기는 범유럽적으로 바로크, 로코코미술이 약 200년간 유행하였다. 예술 사학자 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예술은 사회사의 일부’라는 거시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렇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이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듯이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에 따라 17~18세기의 미술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변형되고 발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17세기에 유행했던 바로크미술을 살펴본다.

바로크는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또는 일그러진 진주’(pérola barroca)에서 유래된 말이다. 16세기 매너리즘 미술(전편 게재)이 매너리즘이 갖는 부정적 의미처럼 한때 저평가되었듯이 17세기 바로크미술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과장된 미술’로 저평가되었다.

인상주의 미술이 ‘인상적이다’라는 조롱조의 비평에서 나온 것처럼 괴기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것을 ‘바로크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바흐, 헨델, 비발디의 바로크 음악도 한때 복잡한 화성, 화려한 기교 등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협주곡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이 음악사의 큰 획을 그었던 것처럼 19세기 후반에는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미술’로 재평가되었다. 사실 르네상스-매너리즘-바로크미술은 16세기 후반부터 중첩되면서 발전하였다.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 유럽의 세력 판도 변화가 영향을 미친 탓이다. 즉 르네상스 미술은 알프스를 넘어가면서 시대환경의 변화로 북유럽의 르네상스 후기 미술과 매너리즘 미술로 변모하였으나, 르네상스 운동의 종말과 함께 종언을 고했으며 17세기 유럽은 바로크미술 시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미술도 자연 이탈리아 중심에서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 다극화되었다. 하지만 구교국가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의 시민적 바로크미술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즉 범유럽적으로 소위 ‘바로크적’ 유사성은 있었으나 지역적으로는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차별성이 있었다.

이탈리아, 스페인의 바로크미술은 교권과 신앙 강화의 수단

그렇다면 지역별 바로크미술의 배경과 특성은 어떠한가? 먼저 16세기 말~17세기 초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바로크미술부터 살펴본다. 이 두 나라는 반종교개혁의 선봉에 선 국가였다. 프로테스탄트 (신교) 종교개혁으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예술과 미술은 ‘신앙 강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지침은 바로크 초기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구교국가인 두 나라는 종교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신교국가의 우상숭배 비판에서 자유롭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성경해석의 정확성과 단순성, 극적인 감동성, 선정성 배제 등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무너진 교권과 신앙 강화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동시대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한 프랑스에서 권력 강화의 정치적 도구로 차용되었으며, 신교국가인 벨기에(플랑드르),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적 바로크미술에 원용되었다.

이렇게 바로크미술은 목적, 주제, 기법 등에서 지역별 차이를 나타내면서 강렬한 명암대비, 역동적인 구도, 극적인 표현, 화려한 장식성 등을 추구하였다. 이는 바로크미술의 특성이면서도 차별적인 감상 포인트가 된다.

바로크미술의 중심지는 로마–마드리드–파리–암스테르담으로 이동

필자는 지난해 6월 2일부터 6일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소피아, 소로야 미술관 등을 시작으로 바르셀로나는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 등을 7월 11일부터 13일간은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 보르게세 미술관 등을 둘러보면서 바로크 초기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물론 이들 미술관 외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왕립국립미술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등도 바로크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어 별도로 방문했다. 둘러본 결과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바로크미술은 교회건축과 회화가 중심이었다.

특히 교회 건축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 톨레도의 그라나다 대성당은 볼 때마다 그 웅장함이 보는 이를 압도하였다. 두 성당은 모두 건축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총체적 종교예술의 전범이었다. 전자는 가톨릭 총본산답게 종교적 권위와 신앙의 위엄성을, 후자는 스페인 제국의 영광을 성당 내외부에 화려하게 시각화한 것에 차이가 있었다.

바로크 회화는 거장들의 생애, 활약 시기, 상호교류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니 중심지가 로마–마드리드–파리-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면서 변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20세기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르네상스 미술은 선적, 평면적, 폐쇄적, 명확성, 다양성으로 바로크미술은 회화적, 입체적, 개방적, 불명확성, 통합성으로 그 특성을 비교한 바 있다.

필자는 이를 염두에 두고 둘러보면서 르네상스 미술은 시대의 변화로 종언을 고하고 바로크미술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리스 건축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도리아(남성미)-이오니아(여성미)-코린트(우아미)식으로 양식의 변천이 이루어졌듯이 예술도 규범의 파괴를 통해 변형되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양식이 혼합된 걸작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바로크 건축물 중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과 쌍벽을 이루는 것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그림 1)이다. 원래는 16세기 초 율리우스 2세 교황 때 브라만테에 이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건축하고 대형 돔을 올린 르네상스 양식이었는데 17세기에 바로크양식이 추가되었다. 대성당과 이어진 원형의 열주 회랑과 성 베드로 광장은 조각가 겸 건축가인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바로크 건축양식이다.

이렇게 두 가지 양식이 혼합된 열쇠 모양의 대성당은 교회 건축의 걸작으로 이후 유럽의 많은 성당이 이를 따라 건축하였다. 여담이지만 대성당과 성 베드로 광장, 교황의 거처인 바티칸 궁,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 등이 소재한 바티칸 시국 주변은 로마 관광의 일번지로 매일 평균 4만~5만명, 매년 평균 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 밖의 바로크 건축물로 동방 선교에 앞장섰던 예수회 총본산, 나보나 광장 등도 있으나 트레비 분수는 어깨너머로 소원을 비는 동전을 던지고 인증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그러나 성 베드로 광장 주변과 트레비 분수는 한국 관광객들도 소매치기를 많이 당하는 장소인 만큼 특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혁신적인 미술가 카라바조, 이탈리아의 바로크미술 선도

이제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바로크미술을 살펴본다. 먼저 이탈리아의 바로크 거장은 카라바조, 카라치, 로렌초 베르니니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카라바조(1571~1610)는 특별하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될 정도로 서양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천재 미술가였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리라화 10만원권에 그의 얼굴이 실릴 정도로 추앙받는 국민화가다.

그의 생애는 반전의 연속이었으며 바로크미술처럼 극적이었다.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밀라노에서 그림을 배운 후 로마로 건너가 ‘성 마태의 소명’, ‘성 마태의 순교’ 작품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거친 성격과 기이한 행동으로 7번의 투옥과 전과 14범이 말해 주듯이 그는 불우한 인생을 살았으며, 한 남성을 살해한 후에는 탈옥자, 도망자로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등을 전전하다 38세로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카라바조는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기법으로 바로크미술을 선도했으며 동시대 바로크 거장인 루벤스, 벨라스케즈, 렘브란트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그림 2)은 바로크미술의 특성을 잘 대변하는 걸작이다. 구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소년 다윗이 돌팔매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쓰러뜨린 후 칼로 그의 머리를 잘라 움켜쥐고 있는 끔찍한 그림이다. 그림에서 소년 다윗의 얼굴은 어린 시절의 카라바조이고 골리앗의 얼굴은 당시의 카라바조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당시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당시의 자신이 입을 벌리고 피를 흘리면서 허공에 들려있는 참혹한 모습은 빛과 어둠의 극적대비 속에서 슬픈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한 남성을 살인하기 전에 내면의 고통과 속죄의 마음을 종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그림은 보는 이의 가슴도 저미게 했다.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 카라바조가 사용한 빛과 그림자, 또는 명암의 극적대비 효과를 강조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은 이후 바로크 회화가 공유하는 특성이 되었다.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은 스페인 바로크미술의 진수

다음은 스페인의 바로크미술이다. 스페인의 바로크 거장은 벨라스케즈, 수르바란, 리베라, 무리요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벨라스케즈(1599~1660)는 특별하다. 그는 24세 때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4세의 궁정 수석 화가가 되어 30년간 활동하면서 스페인 바로크 회화의 전성기를 이끈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시녀들’(그림 3)이다.

시녀들
시녀들

이 그림은 스페인 황실의 초상화지만 복잡한 구도, 원근법에 따른 공간의 극대화, 명암의 극적대비, 등장인물들이 관객을 끌어드리는 복합적인 시점 등을 활용한 스페인 바로크미술의 진수다. 그림에서 중심인물은 펠리페 4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이며 공주 옆의 두 시녀는 그림 제목의 주인공이고 난쟁이와 개, 왕실 소속의 시종들은 당시 유럽 궁정의 흔한 풍경을 반영한 것이다.

이 그림에는 두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하나는 벨라스케즈가 자신을 그림 왼쪽에 키가 크고 검은색의 멋진 옷을 입은 사람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이는 궁정 수석 화가인 자신의 지위와 예술가의 자부심을 과시한 저작권 표시였다. 다른 하나는 그림 뒷면의 거울 속에 왕과 왕비를 희미하게 그려 넣은 것이다.

이는 벨라스케즈가 캔버스 앞에서 두 사람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관객들은 마치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시각적 트릭이다. 이렇게 빛과 어둠의 대비, 현실과 환영(illusion)을 넘나드는 묘사, 관객의 심리까지 활용한 카라바조의 독창적인 기법은 추후 고야, 피카소 등의 거장은 물론, 모더니즘 및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크미술은 유럽미술의 지형변화와 다원화에 기여

이렇게 바로크미술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범유럽적으로 유행했던 미술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르네상스-매너리즘-바로크미술은 각각 독자적인 미술 양식으로 서양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바로크미술은 몇가지 차별적인 시사점이 있다. 즉 르네상스 미술에서 잉태된 매너리즘 미술은 바로크미술을 잉태하였으나 그 차이점은 차원이 다르다.

첫째, 매너리즘 미술이 르네상스 미술에서의 일탈이었다면 바로크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서의 이탈이었다. 둘째, 매너리즘 미술이 범유럽적으로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면 바로크미술은 유럽미술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즉 미술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 다원화된 것이다. 셋째, 매너리즘 미술이 르네상스 미술의 변형을 주도하였다면 바로크미술은 미술의 지역적 특화와 인물 정물 풍경화 등 회화의 장르화를 선도하였다.

이제 구교국가인 이탈리아, 스페인의 바로크 초기 미술은 동시대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의 바로크미술과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의 시민적 바로크미술에 영향을 미치면서 바로크미술의 다원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