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지갑 속에 잠자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아무리 실험이라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다. 돈은 돌아야 하는 데 지갑속에서 잠자는 화폐는 의미가 없다. 게다가 그 기능과 효용 등을 실험하는 단계의 화폐라면 유의미한 검증이나 통계를 얻기 위해서라도 거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한국은행이 이달 1일부터 시작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거래 실험인 ‘한강 프로젝트’의 흥행이 저조한 상황이다. 한은이 21일 공개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 현황에 따르면 지금까지 개설된 전자지갑은 모두 5만1766개다. 당초 10만명을 대상으로 6월 말까지 진행하기로 한 실험인데 아직 목표 인원도 채우지 못한 셈이다.
지금까지 누적 거래건수는 2만9591건이다. 자신의 은행 예금계좌에서 전자지갑으로 토큰화해 입급한 건수(1만5000여건)와 지갑에서 다시 예금계좌로 전환한 건수(2100여건)를 빼면 실제로 온·오프라인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고 결제한 건수는 1만2053건에 그친다. 하루 평균 600건에 불과하다.
한은은 “사용처가 제한돼 있고 비밀번호 입력 등 사용이 불편한 점이 문제인 것 같다”며 “테스트 과정에서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사용처를 늘려 개인간 송금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국제결제은행(BIS)이 주도해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등 글로벌 주요 통화를 가진 국가 및 지역의 중앙은행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아고라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진행하는 국내 프로그램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 뚜렷한 진전이 없어 급할 것은 없다. 다만 실험의 당초 규모를 고려하면 거기서 얻고자 했던 의미있는 기술적 개선 과제나 이용자 편익, 불만 등의 충분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CBDC는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 등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중앙은행들이 수세적으로 고안해 낸 ‘형식만 디지털로 바뀐’ 법정화폐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CBDC는 한은과 시중은행간 거래에서만 사용하고 일반 이용자들은 자신의 은행계좌에 있는 잔액만큼 토큰으로 바꿔 시중에서 전자적 방식으로 결제한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는 의미가 크다. 앞으로 각국 중앙은행의 실험을 통해 안정성이 입증되고 국가간 거래로 진전되면, 무역결제나 환전 등의 외환거래에서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일반 소비자를 비롯한 경제주체들의 거래·송금 등에서 편의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화폐는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서 각종 거래와 결제를 떠받치기 때문에 신뢰가 핵심이다. 가치가 급변동하는 민간의 가상자산이 언제 글로벌 금융시장을 흔들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은 돌다리도 두들겨가면서 미래의 디지털화폐를 차분히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한강프로젝트의 저조한 참여도는 많이 아쉽다.
백만호 재정금융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