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흔들’…유로화 ‘별의 순간’ 잡을까
투자자들, 달러자산에 의구심 … 주요 외신 “유로, 달러 대체 어렵지만 글로벌 안전자산 가능”
미국 트럼프정부의 관세폭탄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장 불안정 속에서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혼란스러운 금융상황에서 투자들은 전통적으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인식되는 달러와 미국채로 몰려든다. 이는 달러 가치를 올리고 국채금리를 낮춘다.
하지만 현재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달러는 다른 주요국 통화 대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미국채 금리는 상승하고 있다.
미국 격월간지로, 정치·공공정책 전문매체인 ‘아메리칸 프로스펙트’는 이달 14일 “이는 글로벌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안정성과 안전성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자산으로서 유로화가 주목 받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달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유로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라며 “아직 유로는 달러를 대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하지만 점점 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유럽이 이 기회를 잡는다면, 잠재적으로 글로벌 금융질서를 바꾸는 역사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아메리칸 프로스펙트도 “유럽이 각국 정부와 투자자들에게 안정성과 안전성을 제공한다면, 1세기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 주요 지도자들도 현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지난달 21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글로벌 금융질서를 뒤흔드는 상황에서 유럽은 금융이익을 증진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전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지난달 20일(현지시각) 유럽연합(EU) 지도자들과의 정상회담에서 “외국 투자자들이 기존 보유 미국채가 만기될 때 재투자하지 않으려 한다. 유럽 금융시장을 통합하면 미국 금융시스템의 대안을 찾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1세기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
물론 유로화가 조만간 달러의 역할을 대체한다고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ING은행 글로벌 거시담당 책임자 카르스텐 브레츠키는 “지난 수십년간 달러 종말을 예고한 경우가 여러번 있었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BCA리서치 수석전략가 마르코 파픽은 “유로가 달러를 대체해 기축통화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낮다”며 “역사상 모든 기축통화는 글로벌 군사적 헤게모니와 동반됐다. 유럽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그 글로벌 영향력은 적어도 향후 10년간 미국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지적한 주요 장애물은 미국채 시장의 규모와 깊이다. 미국채 미상환 잔액은 28조6000억달러에 달한다. 금융시장에서 미국채는 일반 현금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은행과 투자자들은 미국채를 서로 거래하거나 담보로 사용한다. 미국채는 금융시스템의 핵심요소다.
반면 유럽은 미국채와 비교할 만한 게 없다. 유럽공동채권은 불규칙적으로 발행된다. 2024년 말 기준 총 채권잔액은 578억유로로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EU 개별국가의 국채와 비교해 여전히 적은 규모다.
ING의 카르스텐은 “유로를 달러의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만들기 위해 유럽은 확실한 안전자산이 필요하다”며 “유럽공동채권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그 규모는 여전히 만기도래하는 미국채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로화 도입 이후 유럽은 글로벌 금융·무역에서의 달러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유로화는 1999년 탄생 이후 글로벌 입지를 놓고 달러와 경쟁하는 통화였다.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유럽 각국은 유로화가 시간이 지나면 달러와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2010년대 유로존 재정위기가 닥쳤다. ECB는 연준과 달리 최종대부자 역할을 맡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각국 국채는 유동성 위기에 취약했다. 유럽 금융시스템은 국가별로 분열돼 있다. 불안정한 국채가 더 불안정한 금융기관과 연계되는 악순환에 처했다. 또 유럽 자본시장은 이같은 리스크를 보상할 만큼 충분한 규모를 갖지 못했다.
유로존은 투자자들에게 안전한 자산을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국채발행에 인색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국채는 신뢰성이 부족했다. 유럽 전체가 보증하는 공동채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암울한 경제성장 전망은 장단기 금리를 제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유럽자산의 수익률이 낮아지자 유로화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줄어들었다. 유로화는 글로벌 역할을 사실상 상실했다. ECB의 2024년 ‘유로 역할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발행되는 채권의 약 60%가 달러 표시다. 유로 표시 채권은 20%를 차지한다.
안전자산 창출 여부가 관건
결국 이같은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로화의 글로벌 역할이 커질 수 있는 이유를 4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유로존 금융구조가 안정됐다. ECB는 마리오 드라기 총재 시절 위기대응 과정에서 명목상으로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최종대부기관으로 부상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ECB는 1조8000억유로(2조1000억달러) 규모 채권매입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2022년 인플레이션으로 국채금리가 급격히 상승하자 무제한 채권매입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이와 함께 EU는 팬데믹 동안 공동채권으로 8070억유로 규모의 회복기금을 마련해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을 지원했다. 또 ECB는 유럽 114개 은행을 감독하는 기관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 은행들은 유럽 전체 은행자산의 82%를 보유하고 있다.
두번째는 유럽에 대한 투자가 쉬워졌다는 점이다. 팬데믹 회복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공동채권을 발행하면서 유럽에도 진짜 안전자산이 생겼다. 긴축의 대명사였던 독일이 적자재정을 통해 국방 지출을 확대할 준비를 마친 것도 호재다. 전문가들은 독일의 국방지출이 향후 수년 내 국내총생산(GDP)의 2%에서 3.5%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세번째 이유는 유럽 금융감독 기관들이 미국과 비교할 때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유로화는 20개 주권국가의 공동통화로 이를 감독하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존재한다. 지리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달러를 무기화하는 미국과 달리 EU 회원국들은 통화 관리방식 변경에 필요한 합의를 도출하기가 어려울 전망이다. 또 다른 국가에 대한 금융제재를 하려면 27개 EU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국제무역 상황이다. 미국이 글로벌 무역에서 후퇴함에 따라 유럽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전망이다. 유로화로 결제되는 상품과 서비스는 무역금융과 보험, 금리·환율헤지 파생상품 등 유로 기반의 부수적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장외(OTC) 통화 파생상품은 여전히 달러가 지배적이지만, 장외 금리 파생상품은 최근 유로화가 달러를 추월했다.
새로운 무역로가 연결되면 전세계에 유로화 기반 신용·예금 계좌가 늘어난다. 이는 다시 유로화 자산 수요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 전세계 중앙은행들의 유로화 준비금 수요로 이어진다. 중앙은행들은 자국 금융기관들이 보유한 통화를 비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이러한 기회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어려운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부채가 많은 국가들은 재정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촉진해야 한다. 단순히 예산확보를 위해 국채를 추가 발행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독일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그 반대다. 이들 국가는 재정여력을 기반으로 시장에 안전자산을 내놓아야 한다.
한편 트럼프정부가 이른바 ‘마러라고 협정’을 통해 금융시스템을 재편할 수 있다는 보도가 최근 여러 언론에서 나왔다. 미국이 동맹국들과 협력해 달러의 평가절하를 유도,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표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라가르드 총재는 이 아이디어에 대해 “실체가 없는 추측성 합의”라고 일축하면서도 “유럽은 그 어떤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리서치기업 ‘TS롬바르드’의 유럽·글로벌 거시담당 디렉터인 다비데 오네글리아는 “미국이 의도적인 달러 평가절하를 시도한다면 유로화에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며 “하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유럽공동채권을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