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로코코미술은 귀족계급의 장식미술이었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8)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이에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미술을 살펴보았다.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미술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된 문예부흥 운동의 종식과 함께 종언을 고했으며, 17~18세기는 범유럽적으로 바로크, 로코코미술이 약 200년간 유행했다. 예술 사학자 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예술은 사회사의 일부’라는 거시적 관점을 제시했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이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듯이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에 따라 17~18세기 미술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변형되고 발전하였다. 이에 17세기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의 바로크미술은 바로크 미학은 공유하면서도 차별적인 미술을 구현하였다. 이제 18세기에 유행했던 로코코미술을 살펴본다.
로코코(Rococo)는 불어로 ‘조개 무늬 장식’을 의미하는 로카유(Rocaille) 에서 나온 말이다. 17세기 바로크미술에 이어 나타난 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은 미술을 넘어 문학, 음악, 패션 등에 이르기까지 범유럽적으로 유행한 예술 양식이었다. 1715년 태양왕 루이 14세의 사망으로 바로크미술은 종언을 고했다. 이제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궁전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어린 루이 15세(1710~1774)와 귀족들은 파리로 귀환했다. 절대왕권은 존속되었어도 절대권력이 사라진 파리는 귀족들의 세상이 되었다. 시대정신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 정신도 바뀌었다. 즉, 화려함은 공유하지만 절대군주의 권위와 질서를 중시하는 바로크 미학이 귀족계급의 쾌락과 우아함을 중시하는 로코코 미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렇게 로코코미술은 바로크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저택, 별장, 응접실(Salon, 살롱)을 화려하게 꾸미는 ‘감각적인 장식미술’을 추구했으며 그들의 살롱은 사교를 겸한 사상, 문학, 음악, 미술, 과학 등의 토론장이면서 로코코 곡의 연주와 미술의 전시장이었다. 마담 퐁파두르(1721~1764)의 ‘살롱 문화’는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로코코미술은 귀족계급에는 사적 취향과 사생활의 도피처로서 계몽주의자, 부르주아, 일반 민중들에게는 유희, 사치, 방종의 퇴폐적인 예술로 인식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불을 지피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로코코미술은 화려했지만 짧았으며 아름다웠지만 위태로운 미술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로코코미술은 생활과 예술이 접목된 종합적인 미술 양식으로서 유럽 미술사의 한 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로코코미술은 ‘마담 퐁파두르’가 주도한 ‘살롱 문화’의 산물
그렇다면 로코코미술의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사망은 귀족들의 베르사유궁전으로부터의 해방이면서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제 권력의 중심은 국왕에서 귀족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림은 더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었으며 귀족의 거주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실내장식 수단이 된 것이다. 따라서 문화예술의 중심도 궁전에서 귀족들의 응접실로 옮겨졌다. 즉, 살롱이 ‘쁘띠 빨래(Petit Palais, 작은 궁전)’ 역할을 하면서 로코코미술의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그 중심에서 로코코 시대의 문화예술, 철학, 패션 등을 주도하고 로코코미술의 아방가르드(전위) 역할을 한 인물은 루이 15세의 애첩인 ‘마담 퐁파두르(본명: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였다.
그녀는 사업가(군수업)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로얄 미스트리스(Royal Mistress; 왕의 정부, 공식적인 애인)가 꿈이었다. 딸을 하나 둔 기혼녀(유부녀) 임에도 24세 때 루이 15세를 유혹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다. 루이 15세의 총애로 후작 부인이 된 이후에는 자신의 에리(Elysé) 저택이나 벨뷔 궁(Bellevue Palace)에서 ‘살롱 문화’를 주도하면서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부셰, 프라고나르 등의 화가를 후원했으며 백과전서파로 불리는 디드로, 볼테르 등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보호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탄생한 로코코미술은 화려하지만 우아하고 감각적이지만 가볍고 섬세하지만 세련되고 장식적인 미술을 추구하였다. 회화는 곡선적인 흐름, 파스텔 색조의 부드러운 색감, 장식적 유희성, 나른한 에로티시즘 등이 특징이었으며 연인, 사랑, 무도회, 침실 등이 중심적인 제재였다.
베르사유궁전 내 ‘쁘띠 트리아농’, 로코코 건축의 상징
필자는 지난해 6월 11일부터 17일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오르세 미술관, 프티 팔레(파리 시립미술관), 앙드레 미술관, 베르사유궁 등을 방문하면서 로코코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로코코 회화는 건축, 가구, 공예 등과 함께 ‘공간 미학’의 일부이면서 ‘장식미술의 꽃’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프랑스회화관에서는 17~18세기 프랑스 미술이 ‘과장된 아름다움’은 공유하면서도, 남성적이며 역동적인 바로크미술에서 여성적이며 섬세한 로코코미술로 변화되고 ‘빛과 어두움’의 극적대비가 특징인 바로크풍은 ‘빛과 색’의 아름다운 조화가 특징인 로코코 풍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베르사유 본궁에 이어지어진 그랜드 (대) 트리아농, 쁘띠(소) 트리아농은 로코코 시대 (신고전주의 미술도 포함)의 별궁이다. 비극이 늘 그렇듯이 ‘쁘띠 트리아농’은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퐁파두르를 위해 지었지만 완공 전에 그녀는 죽었으며 루이 16세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선물로 하사했다. 그러나 앙투아네트는 영국식 자연 정원과 쁘띠 트리아농 뒤편에 시골 농장(오두막집, 방앗간 등 10채) 마을을 조성하고 목가적인 삶을 추구한 것이다. 이는 민중들에게 왕비가 현실은 외면하고 ‘시골 놀이’를 하며 사치에 빠졌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줌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타깃이 되었다.
혁명 후 방치된 듯 쇠락한 농장은 허무함을 말해주었다. 베르사유궁은 파리에서 지하철로 30~40분 거리 근교에 있고 쁘띠 트리아농은 본궁에서 정원을 지나 도보로 20~30분 거리(셔틀 이용 가능)에 있다. 그렇다 보니 통합권을 예매하고도 본궁을 둘러보다 힘들어서 별궁은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베르사유궁은 건축, 회화, 가구, 공예, 조각, 정원, 별궁 등이 망라된 총체적 예술 공간인 만큼 볼거리가 풍부한 궁이다. 하루 일정으로 여유 있게 동선을 잡는다면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미술을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미술 관광이 된다.
부셰의 ‘마담 드 퐁파두르’, 로코코 시대 ‘문화 아이콘’의 상징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대표적인 거장은 와토, 부셰, 프라고나르, 샤르댕 등이다. 그 가운데 프랑수아 부셰(1703~1770)는 젊은 시절 국비장학생으로 로마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4년간 미술 유학 후 화가의 길을 걷다가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의 총애를 입어 왕립미술 아카데미 학장, 궁중의 제1 수석 화가로 활동한 거장이다. 초기에는 로코코미술의 선구자인 와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와토가 죽은 후에는 프라고나르와 함께 로코코미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부셰는 후원자인 마담 퐁파두르의 전속 화가이기도 하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후기작(1759)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남겼다. 그 가운데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756년의 ‘마담 드 퐁파두르’(그림 1)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부셰가 가장 공들여서 그린 그림이며 그녀의 취향, 지성미, 교양미, 정치적 아우라까지 담고 있는 공식 초상화라고 한다. 이 그림은 원래 퐁파두르 부인의 거처에 걸려있었는데 자산정리과정에서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바이에른 왕실, 또는 루트비히 1세의 손으로 넘어가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기증된 것으로 알려진다. 작품에서 배경인 서재는 그녀의 지성미, 품위 있는 드레스와 안락한 소파에 앉아있는 자세는 그녀의 권력, 책과 문서는 예술, 철학 등의 후원자, 사려 깊은 눈빛은 계몽주의자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 주문 제작 초상화이니 모든 요소가 완벽하다. 그야말로 살롱 문화가 만든 명작의 탄생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로코코 시대의 ‘문화 아이콘’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을 이상적으로 재현한 초상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셰의 ‘오달리스크’, ‘에로티시즘 회화’의 정수
다음은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부셰의 ‘오달리스크(그림 2)’다. 이 작품은 부셰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롤 모델이었던 루벤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로코코 시대 ‘에로티시즘 회화’의 정수로 평가받는 걸작이다. 오달리스크(Odalisque)는 오스만 터키제국 술탄 황제의 별궁(하렘, Harem)에서 시중드는 궁녀를 의미한다. 당시의 유럽의 화가들은 오달리스크를 술탄 황제의 후궁으로 여겨 누드화로 많이 차용했다고 한다. 부셰의 오달리스크는 누워있는 자세로 관람자를 등지고 있지만, 머리는 옆으로 돌려서 관람자에게 은근한 시선을 던지고 있어 더욱 에로틱하다. 살굿빛 피부의 부드러움, 비단이불, 레이블 장식 등의 질감, 파스텔 색조의 감각적 분위기, S자 라인의 풍만한 몸매는 고전적 이상미와 로코코 풍의 관능미를 잘 나타낸다. 이렇게 부셰는 이전의 ‘신화 속 여신’이나, ‘이상미의 여인’에서 벗어나 ‘당대의 여인’을 감각적인 누드화로 재현한 것이다.
부셰는 이 작품으로 루이 15세를 비롯한 왕실과 귀족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많은 궁중 여성들의 초상화와 누드화를 의뢰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부셰의 출세작인 셈이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혁신적이다. 하나는 감상의 주체인 관람자, 즉 당시의 귀족들을 캔버스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선유도를 통해 여성을 소유, 욕망, 쾌락의 대상으로 시각화한 점이다. 다른 하나는 오달리스크의 시선이 수동적이기보다는 관람자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유도를 통해 여성의 능동적 주체성을 시각화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로코코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면서도 당시 귀족계급의 도덕적 해이와 퇴폐의 상징으로 비판받게 되는 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이다. 이후 부셰의 그림은 프라고나르, 앵그르, 마네의 ‘올랭피아’로 이어지는 누드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라고나르의 ‘그네’, 로코코 ‘페트 갈랑트’회화의 진수
한편, 로코코 시대는 ‘우아한 연회’, ‘사랑의 향연’의 의미를 가진 ‘페트 갈랑트(Féte Galante, 연회 화)’가 로코코 회화의 한 장르로 유행했다. 페트 갈랑트는 귀족들의 감각적이며 향략적인 정서를 담은 풍속화로 장 앙트완 와토(1684~1721)가 선구자였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시테르 섬으로의 항해(그림 3)’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섬으로 떠나는, 아니면 돌아온 연인들의 환상적인 정원풍경을 그린 것이다. 당시의 미술 아카데미는 역사화, 종교화만 회화의 최고 장르로 인정했는데 이 작품을 새로운 장르로 공식 인정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와토가 아카데미에 입문하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와토가 창시한 페트 갈랑트는 부셰, 프라고나르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는 프랑스 남부지역 출신으로 어렸을 때 파리로 이주해서 샤르댕, 부셰 공방의 도제로서 화가의 길을 걸었던 거장이다. 그는 부셰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부셰보다 더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붓 터치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대가였다. 한때 마담 퐁파두르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궁정화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으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잊힌 화가로 살다 생을 마쳤다. 프라고나르의 대표작은 런던의 왈라스 컬렉션이 소장하고 있는 ‘그네(그림 4)’다. 그림은 풍성하고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정원에서 그네를 타고 있고 남성은 풀숲에 숨어서 그녀의 다리를 올려다보는 장면이 중심이다.
하지만 귀부인의 구두가 벗겨져 공중으로 날아가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선은 남성을 보는 듯 아래로 두고 있으며 그녀의 뒤에서 중년남성이 그네를 밀고 있는 모습은 정원에서의 에로틱한 ‘사랑놀이’를 암시한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은 유희, 쾌락, 사치, 외설, 장식 미 등 모든 요소가 집약된 ‘페트 갈랑트’ 회화의 진수다. 한마디로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의 감성과 문화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우아함 속에 감추어진 에로틱한 유희, 정원 속의 은밀한 사랑, 장난기 어린 쾌락의 연출은 프라고나르만의 독창적인 기법이다. 그렇다. 프라고나르는 와토, 부셰와 함께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면서도 감성의 결이 다른 캔버스 위의 이야기꾼(storyteller)이었다.
로코코미술은 생활미술, 소형회화 시대를 개척
이렇게 18세기 로코코미술은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귀족들의 파리귀환과 마담 퐁파두르로 대변되는 ‘살롱 문화’ 속에 탄생한 미술이었다. 그러한 로코코미술은 미술사적으로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권력과 권위의 미술이었던 17세기 바로크미술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중세(신 중심)-르네상스(인간 중심)-바로크 (교황, 국왕 중심) 미술에서 마침표를 찍고 귀족계급의 장식미술 시대를 연 것이다. 둘째, 개인의 쾌락과 취향의 미술 시대를 열었다. 즉, 바로크 시대의 종교와 정치적 수단이었던 종교화, 역사화는 퇴조하고 생활과 미술이 접목된 생활미술 시대를 연 것이다. 셋째, 소형 캔버스 미술 시대의 문을 열었다. 바로크 시대(네덜란드 제외)의 교회, 궁정의 주문에 따른 대형미술보다는 귀족들의 저택, 별장, 살롱의 벽면에 거는 소형회화가 활성화되었다. 로코코미술은 귀족들의 ‘삶의 미학’이고, 그들만의 ‘장식미술’이었으나 계몽주의자, 부르주아, 일반 민중들에게는 현실을 외면한 ‘찰나의 미학’이고 ‘퇴폐적인 미술’로 치부되었다. 이제 로코코미술은 혁명의 물결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시대정신은 이성과 도덕, 고대의 이상을 찾는 신고전주의 미술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