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제조업 노스탤지어’의 함정
파이낸셜타임스 “보호무역으로 일자리 창출?… 미국의 가난 부를 것”
1980년 7월 19일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텍사스 유세에서 격동적인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우리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We can make America great again)”고 외쳤다. 이후 ‘MAGA’ 슬로건을 앞세운 레이건은 당시 민주당 맞상대였던 지미 카터를 물리치면서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케인스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시 시장 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레이건은 미국의 최우방국인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내세웠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세계시장은 공산권까지 확장됐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지구촌은 하나의 시장으로 넓혀졌다. 미국은 풍요로운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롤모델은 레이건이다. 트럼프는 레이건의 슬로건이었던 “MAGA”를 줄창 외친다. 레이건처럼 감세와 규제완화, 군사력 증강 등에 몰두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레이건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자유무역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레이건은 보호무역을 허물었지만 트럼프는 관세장벽을 쌓고 있다. 레이건은 ‘오프쇼어링(생산기지 해외이전)’으로 국제분업을 추구했지만, 트럼프는 ‘온쇼어링(해외공장 자국유치)’을 외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러스트벨트(제조업 쇠락지역)’를 부활시켜 ‘MAGA’를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미국의 발전, 수십년 뒷걸음질”
과연 트럼프의 이런 꿈은 실현될 수 있을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3일(현지시간) ‘제조업 노스탤지어, 미국의 가난 부른다’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미국을 ‘제조업 슈퍼파워’로 만들겠다는 트럼프 구상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분석하는 내용이다. 관세장벽으로 미국 제조업을 보호하고, ‘온쇼어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미국의 발전을 수십년 뒷걸음질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FT의 분석이다.
트럼프는 미국 기업은 물론 외국 기업들에게도 ‘온쇼어링’을 압박하고 있다. 압박 수단은 관세장벽이다. 트럼프는 모든 국가에 일괄적으로 10% 보편관세를 부과하고, 거기에 나라별로 상호관세를 추가했다. 중국에는 20%의 보편관세를 포함해 최대 245%의 관세를 안겼다. 높은 관세를 내기 싫으면 미국에서 공장을 짓고 물건을 만들라는 배짱이다.
거센 후폭풍이 몰아쳤다. 미국 자본시장은 폭락했다. 트럼프를 지지했던 월가의 억만장자들까지 트럼프를 비난하고 나섰다. 트럼프는 굽히지 않고 있다.
“나는 아웃소싱 기업이 아닌 노동자를 위한 대통령이다. 나는 월가가 아닌 메인스트리트를 대변하는 대통령이다. 나는 정치권이 아닌 중산층을 보호하는 대통령이다. 나는 그런 점이 자랑스럽다.”
다시 공장을 세운다고 제조업이 부활할까? 개도국의 공장들을 미국으로 옮겨놓는다고 치자. 과연 그런 공장의 궂은 일을 하려는 미국인은 얼마나 될까?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싱크탱크 케이토 연구소(Cato Institute)는 지난해 한 조사를 통해 “현재의 일자리 대신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4명 중 1명뿐”이라고 밝혔다. 미국인 대부분은 생산직에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생산직을 마다하지 않는 이민자들에 적대적이다. 올해 1월 20일 취임 첫날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이민을 추방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1기 때부터 불법이민을 막기 위한 국경 장벽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나마 공장일을 할 수 있는 이민자들을 쫓아내면서 공장 유치를 독려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진퇴양난이다. 트럼프의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해 공장을 선뜻 미국으로 옮길 수 없는 사정이 기업마다 있다. 생산 시설 이전 비용과 노동자들의 임금, 공급망의 안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플의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 웨드부시(Wedbush) 증권의 애널리스트인 댄 아이브스(Dan Ives)는 아이폰 공급망의 10%를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는 데만 최소 3년의 시간과 300억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트럼프정부는 블루칼라 일자리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과도기적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지난달 2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해방의 날”을 선언하면서 한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장들이 잇따라 문을 닫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의 관세 정책으로 공장들은 다시 가동하고 제품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3~4년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말 기대된다.”
과연 트럼프는 미국을 더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까? 도이체방크의 글로벌 거시경제 연구 책임자인 짐 리드(Jim Reid)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부와 소득은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국제 무역 비중에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 더 효율적인 글로벌 공급망과 더 넓은 시장, 더 저렴한 신흥시장의 노동력에 접근하는 혜택을 누렸다.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비중이 그만큼 커지고, 미국민들의 부와 소득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는 것이 리드의 주장이다.
물론 트럼프의 주장대로 수입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미국의 공장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과거 번창하던 산업 지역은 이른바 ‘러스트 벨트’로 쇠락했다. 하지만 손실에만 집중하고 미국의 무역 개방을 억제하려 한다면, 더 큰 경제 전반의 혜택을 잃게 된다. FT의 보도는 트럼프의 셈법이 합리적이지 못함을 드러낸다.“1990년 이후 미국에서는 500만개 이상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전문직과 비즈니스 서비스 분야에서 1180만개의 일자리가 생겨났다. 다국적 공급망과 연계된 운송 및 물류 분야에서도 330만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FT는 “미국은 저임금 일자리를 아웃소싱한 뒤 서비스와 연구개발, 첨단 제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경제 활동으로 전환했다”면서 “대부분의 기준에서 미국은 이미 제조업 초강대국”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롤모델인 레이건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 레이건은 두번째 임기 첫해인 1985년 9월 TV회견에서 “자유무역만이 미국의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의회에 계류 중이던 보호무역 법률안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설이었다. 레이건은 자유무역을 통해 미국은 1000만명의 새로운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상대국에 대한 미국의 규제조치는 미국 산업과 농업에 대한 외국의 보복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거 미상원이 보호주의법안을 통과시간 후 국제무역전쟁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40년 전 레이건의 연설은 지금 미국 상황에 대입해도 놀랄 만큼 맞아떨어진다. 중국 등 무역상대국들은 트럼프의 관세폭탄에 맞서 미국 산업과 농업을 겨냥한 보복관세로 대응하고 있다. 세계는 이미 국제무역전쟁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트럼프의 ‘제조업 노스탤지어’가 부른 혼돈이다.
대한민국 제조업에도 격랑
트럼프의 ‘제조업 노스탤지어’는 대한민국 제조업에도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 자동차와 철강과 반도체 등 우리나라 간판기업들이 줄줄이 대규모 대미투자에 나서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에 21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현대제철은 58억달러(약 8조2200억원) 규모의 제철소를 미국에 지을 계획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바이든정부 시절 각각 370억달러(약 52조4500억원)와 38억7000만달러(약 5조486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트럼프는 “다른 나라의 공장과 일자리를 미국으로 빼앗아오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의 말 그대로 우리는 지금 미국에 공장과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짓는 만큼 국내 제조업과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의 ‘러스트 벨트’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산업공단들이 자칫 ‘러스트 벨트’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정녕 이대로 끌려다니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트럼프의 ‘제조업 노스탤지어’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까지 가난의 함정에 빠뜨릴까 걱정이다. 이런 위중한 때 나라의 리더십마저 비어 있다. 누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할 것인가?

칼럼니스트
지구촌 순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