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한덕수 프로젝트는 ‘보수 멸망의 길’인가

2025-05-07 13:00:01 게재

보수가 정당성을 얻고 통치세력으로 존립할 수 있는 이유는 나라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보통사람들의 믿음과 기대 때문이다. 그런데 ‘한덕수 프로젝트’는 그런 보수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저버린다.

동시에 불신과 실망과 분노를 키운다. 나라의 안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세력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면서 보수의 자격을 상실하고 결국 사멸의 길로 나아갈 ‘정체 모를 기생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6.3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서 20%대를 상회해 보수 주자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또 보수 후보 단일화를 하면 이재명 후보를 10% 안쪽으로 추격할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렇다(중앙일보·한국갤럽 2025년 5월 3~5일 조사 기준,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정치세력의 존립에 중요한 건 지지율이 얼마인지보다 그 지지의 성격이 무엇이냐이다. 특히 나라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기대를 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 전 총리의 지금 지지율은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한 전 총리의 지지율은 그가 잘할거라는 믿음과 기대가 아닌 ‘반이재명’ 정서와 ‘극우 김문수에 대한 우려’ 그리고 ‘젊은 이준석에 대한 의심’이 담겨 있을 따름이다.

보통사람들이 믿음과 기대 주기에는 부족

한 전 총리에게 보통사람들이 믿음과 기대를 주기에는 그의 공직자로서의 삶에 특출난 게 없다. 특히 12.3사태 이후의 행보에는 하자가 많다. 그의 공직자로서의 삶 전반을 애국심 애민심 청렴함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인 국무의 운영 등의 관점에서 볼 때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게 눈에 띄지 않는다.

12.3사태 이후에는 스스로 나서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 문제 등을 둘러싼 시비를 가져와 대통령 권한대행의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치 못했다. 대부분의 정치학자와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 때까지도 그를 대선주자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 전 총리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선거법 위반에 대한 유죄 취지의 대법원 파기환송 결정이 내려지고서야 출마선언을 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한 낡고 부당한 것과의 싸움으로도, 국가의 새로운 비전을 향한 신념의 표출로도, 그것을 위한 숭고한 도전과 희생으로도 읽히지 않는다.

보수는 “변하지 않으려면 먼저 변하라”를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18세기 이후 의식과 정치와 경제 등 문명의 영역 전반에 걸쳐 몰아닥쳤던 (자유주의-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에 맞서 보수가 살아남고 통치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것은 그 지침을 따른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변화의 내용과 방식은 국민 다수가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부와 권력을 억지를 부려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그것의 변칙적 옹호와 계승도 아니었다. ‘다수의 평범한 견해를 구현하는 비범한 능력’을 선보이는 식이었다.

영국 국왕의 필독서 '영국 헌정'의 저자이자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편집장으로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 논객이었던 월터 배젓은 그런 정치인을 ‘정치 천재’라고 했다. 월터 배젓은 지금의 정치인들도 살펴 읽고 귀담아 들을 ‘사표(師表)’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사태가 헌정체제를 위협하고 국민의 삶의 안정을 해치는 부당한 권력의 행사라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다.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려면 그 평범한 견해를 구현할 비전과 전략과 그를 수행할 인물과 리더십(정치 천재)을 선보여야 한다. 책임자 처벌에서부터 재발 방지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교훈 삼아 나라를 복되게 할 방책도 내놓아야 한다.

‘다수의 평범한 견해’ 대표하는 능력 보여야

국민의힘이 대표하는 (극)우파 보수세력의 ‘악마화’ 전략 구사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후보가 대선경쟁 가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그 평범한 견해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덕수 프로젝트로 이를 뒤집기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사법적 수단을 무리하게 동원해 이재명 대표를 낙마시키는 것까지 한덕수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면 그건 보수 멸망의 길 중에서도 지름길이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으며 극심한 혼란과 불안정 속으로 빠져드는 길이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 휴마니타스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