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의 스승, 사서를 다시 생각한다

2025-05-07 13:00:46 게재

2025년, 인공지능(AI) 산업의 중심에서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스케일 AI(Scale AI)다. MIT를 자퇴한 19세 청년 알렉산드르 왕(Alexandr Wang)이 루시 구오(Lucy Guo)와 공동 창업한 이 회사는 AI 학습에 필수적인 데이터 서비스를 제공하며 급성장했다. 현재 기업 가치는 약 250억달러(한화 약 35조원)에 이르며 AI 생태계의 핵심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케일 AI의 성공은 단순한 기술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이 회사는 ‘최고의 모델은 고품질 데이터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AI의 성능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데이터이며 이 데이터를 의미 있게 구조화하는 작업이 핵심이다.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은 수천 명의 데이터 주석자들이었다. 그들은 텍스트 이미지 오디오 등 다양한 데이터에 체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AI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데이터 라벨링은 중요한 지적 노동이지만 어디까지나 주어진 규칙에 따라 분류하고 표기를 부여하는 작업에 가깝다. 반면 사서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지적 작업을 요구한다. 단순히 ‘라벨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보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올바르게 연결하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러한 전문성은 AI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사서는 단순한 데이터 관리자나 분류자가 아니다. 오히려 AI에게 세상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가깝다.

사서는 ‘지식의 구조’ 설계하는 역할

AI 산업의 경쟁력은 이제 데이터양뿐만이 아니라 정제된 고품질 데이터에 있다. 의미와 맥락을 읽어내고 정보를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사서들의 역할은 더욱 빛을 발한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늘날의 도서관은 지식을 해석하고 정보를 연결하며, 데이터에 질서를 부여하는 전문적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왕은 “인간의 라벨 작업 없이는 AI는 성장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수백 년 전부터 지식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을 체계화해 온 사서들의 존재는 왜 지금까지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는가. 사서는 AI 시대를 여는 가장 섬세한 지식 설계자이자 정보사회 전체를 튼튼하게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건축가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사서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지식의 미래를 설계하고, 인간 중심의 정보 생태계를 정교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가끔 상상해 본다. 만약 국립중앙도서관이라는 조직을 기업 가치로 환산한다면 어떨까. 방대한 자료수집 역량, 고품질의 메타데이터 자산, 그리고 오랜 시간 축적된 전문 사서들의 집단지성을 고려할 때 국립중앙도서관은 스케일 AI를 뛰어넘는 훨씬 깊고 풍부한 가치를 지닌 조직이라 자부할 수 있다. 80년의 역사를 품은 국립중앙도서관은 이제 AI 시대를 맞아 단순히 정보를 보관하는 곳을 넘어 대한민국 지식 인프라의 최전선에서 미래를 열어가는 거대한 플랫폼이자 지식 생태계의 중심축이 되어가고 있다.

거대한 플랫폼이자 지식 생태계 중심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의 지식 역량을 세계로 확장하는 거대한 플랫폼이자 기술과 인간, 데이터와 의미를 연결하는 새로운 차원의 스케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사서가 있다.

김희섭 국립중앙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