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심계천하’는 아니더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제.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다. 사회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맞는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쓴다. ‘높은 사람이 세상을 걱정한다’는 심계천하(心系天下)와도 일맥 상통한다.
이 표현은 가끔 정반대 행동을 하는 이들을 비판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 국내 유통공룡(재벌) 오너들이 그렇다. 부와 권력만큼 책임과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솔선수범은 눈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넉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유통그룹 오너들은 한목소리로 ‘위기’를 외쳤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강도 높은 쇄신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무건전성을 높여야 한다”며 핏대를 세웠다. 롯데그룹이 사상 최악의 재무 건전성 위기에 빠졌던 시기였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도 “고물가와 불경기 등으로 시장상황이 나쁘다”며 “책임회피·온정주의 같은 조직 발전을 저해하는 병폐를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 손경식·이재현 CJ그룹 회장 역시 비슷한 신년사를 내놨다. 표현만 다를뿐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얘기였다. 직원을 상대로 희망퇴직을 받거나 임금을 동결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지난 넉달 유통업계 종사자들에겐 ‘고난의 행군’이었다.
유통재벌 오너들은 그러나 달랐다. 실적부진에도 이들 주머니 사정은 넉넉하게 채워졌다. 급여와 상여금으로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100억원 넘게 받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지난해 지주사인 CJ㈜에서 156억원, CJ제일제당에서 37억원 이상을 수령했다. 이 가운데 112억원은 상여금이었다. 신동빈 회장은 롯데지주에서 60억원, 롯데케미칼에서 38억원, 롯데칠성음료에서 35억원, 롯데웰푸드에서 26억원, 롯데쇼핑에서 20억원 등 줄잡아 178억원을 보수로 챙겼다. 상여금 일부를 덜 받은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과 정유경 회장은 각각 36억원을 받아갔다. 위기와 고통분담은 온전히 직원들 몫이었던 셈이다.
물론 재벌총수라고 급여나 상여금을 받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최고경영자로서 세상 걱정은 못해도 상처를 입었을 직원 마음은 보듬었어야 한다. 위기라며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려면 최소한의 ‘성의’와 ‘신뢰’를 보여줬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나마 1억원 가까이 상여금을 자진 삭감한 신세계그룹 정 회장 남매가 돋보인다. 이들 역시 ‘자수성가’ 1세대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처럼 상여금을 전혀 받지 않았다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터다.
‘검증’없이 최고경영자 자리를 물려 받은 유통재벌 2세들의 한계가 분명해 보이는 요즘이다.
고병수 산업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