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본시장 통합, 왜 지지부진한가
투자 불신 유럽인, 저축 선호 … FT “규제 통일과 스웨덴 투자문화 확산이 관건”
유럽의 특출난 기업들은 유럽 내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보다 미국의 풍부한 자본시장을 두드린다. 저축이 풍부한 유럽이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엔 고개를 가로젓는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13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2013년 설립된 에스토니아 차량공유앱 ‘볼트(Bolt)’의 최고경영자(CEO) 마르쿠스 빌리그는 유럽의 투자위험 회피 성향을 아쉬워하는 주요 인물이다.
빌리그는 자금조달을 목표로 유럽의 거의 모든 벤처투자자들을 만났지만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 투자자들은 여러차례에 걸쳐 10억달러 넘는 자금을 기꺼이 건넸다. 그같은 자금을 기반으로 현재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총 45개국에서 서비스를 운영한다.
빌리그는 FT에 “미국 투자자들은 에스토니아법인을 통해 투자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었다. 유럽 벤처투자자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를 꺼리는 성향으로 유럽은 아마 3조~5조유로의 부를 창출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라며 “유럽이 자본시장을 개혁하지 않으면 기술과 혁신, 모든 중요한 분야에서 계속 미국에 뒤처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투자위험 감수에 소극
자본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유럽 최대 어젠다다. 유럽연합(EU)은 더 깊고 통합된 자본시장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U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자본시장 개혁 프로젝트를 두번째 임기 내 최우선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이를 위해 EU위원회는 지난해 ‘저축·투자연합’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유럽의 방대한 가계저축을 생산적 투자로 유도하기 위해서다. 또 △증권화 부활 △감독권한 중앙화 △소매투자 촉진 △파산법 협상 마무리 △은행연합 완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 7개국에서 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유로넥스트 최고경영자 스테판 부즈나는 “유럽은 높은 저축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를 생산적 투자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의 분열된 금융구조가 문제의 핵심”이라며 “유럽 자본시장은 각기 다른 규칙과 규제기관, 투자문화를 가진 국가별 시스템의 혼합체다. 그나마 유동성 우물 역할을 하던 런던도 EU를 떠난 상태”라고 덧붙였다.
미국과의 대비는 명확하다. 미국은 단일시장 규제기관 아래 통합된 자본시장과 거래시스템이 리스크 감수와 주식투자 문화를 떠받친다. 부즈나는 “27개의 서로 다른 법적체계와 27개의 서로 다른 감독개념 위에 번영하는 주식시장을 구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본시장을 개혁하려는 유럽의 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EU의 ‘자본시장 통합(CMU)’ 프로젝트는 10년 전 시작된 과제다. 지난 10년 공시제도 개혁과 중소기업의 공개시장 접근성 개선 등 일부 대목에서 진전이 있었지만, 유럽 자본시장은 여전히 분열되고 미발달된 상태다. 때문에 기업들은 은행대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EU 기업들이 자본시장을 통해 조달하는 자금은 미국 대비 1/3에 불과하다.
폴란드 재무장관 안제이 도만스키는 지난달 “20년간 유럽 정치인들은 자본시장 통합을 논의했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달성된 것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EU 지도자들은 정치적 동력을 얻었다고 본다. 유럽의 약한 자본시장이 경제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EU에서 미국으로 연간 300억유로의 자본이 유출된다고 추산했다. ECB 총재와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는 지난해 ‘유럽경쟁력 보고서’에서 EU에 필요한 연간 투자액이 800억유로 규모인데, 그중 일부만 공공지출로 충당되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투자자들도 수년간의 실패 끝에 자본시장 통합 모멘텀이 형성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유럽 최대 자산운용사인 프랑스 아문디그룹 최고투자책임자(CIO) 뱅상 모르티에는 “이번에는 다르다고 믿는다”며 “저축·투자연합 출시는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의미 있는 변화”라고 말했다.
모르티에는 “유럽 자본시장 통합으로 미국에 대한 대안을 창출하고 유럽 내 저축을 생산적 투자로 전환해야 한다. EU위원회와 ECB가 사안의 긴급성을 이해하고 있다”며 “하지만 모든 이해관계자와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EU지도자들은 모멘텀 얻었다지만…
유럽 시스템은 세금과 규제, 파산처리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불균형하다. 2023년 유럽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그리스의 파산 중소기업 채권자들은 평균적으로 채권액의 5%만 회수 가능하다. 룩셈부르크의 경우 평균 75%를 되찾는다.
이 격차는 국가별 파산법 차이에서 비롯된다. 유로넥스트 부즈나 CEO는 “파산규정은 가족법과 마찬가지로 각 사회의 구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며 “하지만 각국간 적절한 파산법 조화는 채권시장의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장애물은 금융자산, 특히 대출을 시장성 있는 증권상품으로 패키징하는 증권화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기업과 투자자 모두에게 중요한 도구였던 유럽 증권화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장 참여자들은 과도하게 복잡하고 신중한 규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2022년 기준 EU의 증권화상품 연간 발행규모는 GDP의 0.3%에 불과하다. 미국 4%에 크게 못 미친다. 미국에서는 패니매와 프레디맥 등 정부지원기관이 상업은행 발행 주택담보대출 수십억달러를 투자상품으로 패키징한다.
집행문제도 주요과제다. EU와 시장에서는 중앙기구의 감독강화가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의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와 비슷하게 유럽 각국의 은행들과 주요 거래플랫폼에 직접 감독권한을 행사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아일랜드와 룩셈부르크 등 자산관리·운용 산업이 발달한 국가들의 반발이 거세다.
저축을 투자로 전환하려는 EU가 롤모델로 삼는 국가는 스웨덴이다. 스웨덴에서는 세대를 망라해 연금과 저축을 주식에 노출시키는 문화가 정착됐다. 모든 사회계층은 ‘ISK’라는 세금우대계좌를 통해 주식과 펀드에 투자한다. 전체 가계 중 70%에 육박하는 가계가 주식과 뮤추얼펀드, 연금펀드 등에 투자한다. 이같은 투자문화로 스웨덴 자본시장 유동성이 강화되면서 소규모기업들도 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가계가 투자의 출발점인 스웨덴
스웨덴 재무장관 엘리자베스 스반테손은 “ISK는 저축계좌로 불리지만, 사실은 투자”라며 “투자로 전환된 자금은 혁신기술과 성장가능성이 큰 기업으로 흘러간다. 우리 자본시장이 잘 기능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나스닥스톡홀름 회장 아담 코스티알 회장도 “출발점은 가계여야 한다. 투자자의 탄탄한 기반이 없다면 건강한 공개시장을 구축할 수 없다”고 동의했다.
스웨덴에는 발렌베리와 키네빅 같은 전통의 투자가문들이 스타트업들의 성장을 돕는 ‘장기투자자본’을 공급한다. 덕분에 스웨덴은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 결제기업 ‘클라르나’ 등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술기업들을 배출했다.
FT는 “스웨덴의 성공은 유럽 전역에서 그같은 모델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많은 국가들이 스웨덴을 따라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점을 강조한다”며 “대부분의 유럽인은 주식시장에 경계심을 품고 있으며 투자방법을 잘 모르거나 저축을 잃을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인은 가계소득의 15%를 저축하지만, 주로 저위험상품인 예금계좌에 맡겨둔다. 2015~2021년 EU 내 평균 가계는 금융자산의 32%를 현금과 예금에 보관한 반면, 미국 가계는 금융자산의 13%만 현금·예금으로 갖고 나머지 절반 이상을 주식과 투자펀드에 투자했다.
공공자금 지원을 받아 상대적으로 풍부한 유럽의 퇴직연금 시스템도 투자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유로넥스트 부즈나는 “미국에서 퇴직하려면 젊은 시절 주식을 사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유럽에서는 자신의 노후에 다른 사람이 세금을 내주길 희망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볼트의 빌리그 CEO는 “스포티파이나 클라르나가 해외상장을 선택한 것은 그 기업 창업자들이 미국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떠밀렸던 것”이라며 “기업들은 미국에서 더 나은 가치를, 더 많은 유동성을, 더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는 심각한 경고신호”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