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겸손은 인공지능 시대의 생존전략이다

2025-05-20 13:00:03 게재

‘교실혁명’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던져진 교육계의 강력한 슬로건이다. 과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혁명이라면 교실의 기술이 아닌 인간의 뇌, 사고 방식에서 먼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AI가 눈깜짝할 사이에 정답을 찾아주는 시대다. 동시에 놀라울 만큼 정교한 가짜 정보도 만들어낸다. 나 대신 공부해서 글쓰고 말하고 그려주는 서비스가 매일 쏟아지는 시대에 정답을 빨리 찾아내는 능력만 ‘지능’이라 여긴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제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2025년, 더 많이 아는 뇌가 아니라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뇌가 필요하다.

겸손은 그저 ‘착한 마음씨’가 아닌 AI 시대의 생존전략이다. 인간만이 할 줄 알았던 사고와 판단의 영역까지 AI가 와 자리잡은 오늘이다. 기술과 지식, 심지어 윤리기준마저 빠르게 변화한다. 어떤 가치는 같은 시대에도 문화마다 다르고 같은 문화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헤쳐나갈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는가? 자녀들에게 당신의 경험과 철학에만 귀를 기울이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나’라는 존재의 주도권을 지키게 하는 인지적 힘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근육에서 나온다. 바로 인지적 유연성이다.

인지적 유연성은 생각을 고정하지 않고 새로운 정보에 따라 사고방식을 조절하는 능력으로 아동발달 연구에 따르면 인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전통적인 지능(IQ) 역시 겸손과 관련된 요인이었으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뛰어나면 겸손한 태도 형성에 유리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뛰어나다고 해서 더 겸손해지는 건 아니다. 결국 태도와 정보처리 방식의 문제다.

인지적 겸손 높을수록 오류처리 능력 높아

정보처리 과정에서 겸손의 성질을 찾아보자. 인공지능 분야에서 자주 활용되는 베이지안 추론은 처음엔 짐작으로 시작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해 더 정확한 답에 가까워지는 방식이다. 이 원리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 살았던 성직자 토마스 베이즈의 연구에서 출발해 오늘날 통계와 데이터 과학, 의료, 금융 등 여러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정보에 따라 갱신하는 방식은 인간의 겸손과 닮았다. 우리가 실수하는 순간 두뇌에서는 자동적 오류감지 신호(Error-Related Negativity)가 발생하고 수정하려는 반응이 나타난다. 잠시 후엔 의식적으로 실수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단계(Error Positivity)로 이어진다. 이러한 두뇌 반응과 인지적 겸손의 관계를 탐구한 연구결과는 인지적 겸손이 높을수록 자신의 잠재적 오류 가능성을 잘 받아들이고 오류를 처리하는 의식적인 방식이 남다름을 보여준다.

똑똑한 바보가 되기 십상인 디지털 시대엔 겸손이 특히 필요하다. 유튜브 알고리즘, AI 추천, 인터넷 커뮤니티의 확증편향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들로 주변 공기를 꽉 채운다. 내 생각만이 점점 ‘진실’처럼 느껴지고 다른 시선은 ‘틀린 것’이 된다.

그런 정보가 가득 찬 공간 안에선 성장은 불가능하고 다채로운 시각을 갖기는 글렀다. 외부 피드백을 막고, 폐쇄회로 속에서 자기확신만 키우다 결국 시대에 뒤처진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까지 논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런 필터버블(filter bubble)을 터트릴 바늘은 겸손뿐이다. 겸손은 ‘업데이트 가능한 인지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 지능의 생명 유지 장치다.

겸손 키우는 방법 ‘자기 참조적 말하기’

겸손을 키우는 전략을 믿음과 실천으로 살펴보자. 우선 ‘나의 지능은 변화한다’는 뇌가소성, 그리고 ‘인지적 겸손은 훈련 가능한 사고습관’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일상에서 겸손을 키우는 구체적 방법으로는 ‘자기 참조적 말하기’를 제안한다. ‘너도 틀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해. 다시 생각해보자’라거나 ‘너는 때때로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해. 오히려 더 현명한 선택이야.’라고 2인칭 시점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다. 인지과학 연구에 따르면 이런 사고 방식은 복합적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두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와 깊이 연결된다고 한다.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고 싶다면 겸손하라.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전혀 다른 정치적 견해를 지녀 괴롭다면 겸손하라. AI시대에 살아남는 똑똑함을 원한다면 역시 겸손하라.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힘은 지능이 아니라 자신의 지능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능력, 바로 겸손에 있다.

박영민 카이스트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사